▲ 영화 분노의 역류(Backdraft, 1991년) 중 한 장면 | |
ⓒ 분노의역류 |
<분노의 역류>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때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전율은 아직도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장면 장면이 강렬했고, 내러티브는 살아있었다. 론 하워드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감동있는 스토리, 스펙타클한 CG에 이르기까지 나무랄 데가 없는 '웰메이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압권이었던 건 영화의 원 제목인 'Backdraft' 현상을 기가 막히게 재연했다는 거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거침없이 폭발하는 화염 속을 뚫고 생명을 구하는 '커트 러셀'의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의 모습은 존경과 경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화염 속을 걸어가는 소방관을 형상화한 포스터가 아직까지 뇌리 속에 남아있는 이유다.
"누군가는 막아야 하고 현장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말이 나오고 다들 현장에 들어가기를 회피한다. 하지만 구조대원이기에 내 의무를 다할 때가 됐구나 하고 화학복을 입으면서도 막내 소방관에게는 '넌 여기 남아있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잘못돼면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내가 죽어도 같이 죽자면서 화학복을 입을 때 가슴으로 눈물을 흘렸다."
지난 2012년 구미 불산 누출사고 당시 진화작업에 나섰던 소방공무원의 후기 중 일부다. 소방공무원들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 <분노의 역류>를 보고 난 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 무렵 화재진압에 나섰던 소방공무원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고, 이를 기화로 그들의 열악한 복무 환경과 처우 등이 알려지며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됐다.
소방공무원의 실상은 씁쓸함을 넘어 충격 그 자체였다.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영웅'이자 '의인'인 그들은 정작 현실에서는 그에 걸맞는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화재진압을 위한 필수장비인 소방장갑을 소방공무원들이 직접 구매해야 하는가 하면, 활동화가 떨어져도 예산 부족 때문에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낡은 구조 사다리를 걱정해야 했으며 심지어 폐차되야 할 노후한 소방차를 타고 현장에 출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관련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땀과 얼룩으로 범벅이 된 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들의 모습에 분노가 '역류'한 것이다. 각계각층으로부터 소방공무원들의 근무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라는 민원이 빗발쳤다. 국가직과 지방직으로 이원화된 체제를 손봐야 한다는 요구도 분출됐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여건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보이고 있는 현행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며 소방공무원의 국가직 입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소방공무원의 근무환경과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음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안전처를 신설하면서 기존의 소방방재청을 해체했고, 국가안전처 산하의 중앙소방본부로 강등시켜버렸다. 소방공무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법률 개정안 역시 이렇다 할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대부분 국회에 계류 중에 있다. 그 사이 4만 소방공무원들은 여전히 생사를 넘나드는 현장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중이다.
ⓒ 오마이뉴스
소방 공무원들은 현재 국가직과 지방직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국가직 소방 공무원은 중앙소방학교에서 경력경쟁채용시험(경채)를 통해 선발되고, 지방직 소방 공무원은 공개경쟁채용시험(공채)를 거쳐 선발된다. 이 중 경채와 공채의 비율은 1%대 99%다. 문제는 경채와 공채 사이의 극명한 괴리다. 중앙정부에서 지원을 받는 국가직과 지자체에서 지원을 받는 지방직의 처우는 봉급에서부터 장비, 복지는 물론이고 승진기간이나 비율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방공무원 역시 양극화의 화살을 비켜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새 정부가 소방공무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조치들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어 주목을 끈다. 정부는 최근 발표한 정부조직개편안에서 국민안전처의 폐지 방침을 정하고, 그 산하에 있던 소방본부를 '소방청'으로 분리·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응급 상황시 보다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조직개편 이유를 설명했다. 위상이 격상됨에 따라 소방청은 앞으로 인사와 예산 등에서 독립적인 권한을 갖게 될 전망이다. 부족한 인력과 장비 등을 보다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7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용산소방서를 방문해 소방공무원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한편, 처우개선을 약속하기도 했다. 일자리 추경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날 간담회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소방공무원들을 위한 장비지원과 인력확충 등의 처우개선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다짐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소방공무원 법정인원 확충, 국가 공무원 전환, 소방관 의료제도 마련 등의 공약을 내세운 바 있다.
그동안 소방공무원은 시민들에게 늘 존경과 신망의 대상으로 손꼽혀왔다. 33개 직업군 중 신뢰도 1위, 공무원 중 신뢰도 1위,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직업 1위 등의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소방공무원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정작 소방공무원의 직업 만족도는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소방관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이는 문 대통령과 소방공무원과의 간담회 자리 뒤편에 선명하게 찍혀있던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이 애절해 보이는 건 이 땅의 소방공무원들이 남모르게 흘렸을 눈물과 삶의 무게가 그 속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일 터다. 더 이상의 아이러니는 없어야 한다. 그들의 고충과 애환에 귀를 기울여야 함은 물론 법과 제도를 정비해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위험천만한 험지에서 시민의 생명과 사회의 안전을 책임져온 그들은, 그에 합당한 처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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