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심규홍 부장판사)는 지난해 교육감 선거에서 상대 후보 고승덕 후보의 미국 영주권 보유 의혹을 제기해 기소된 조희연 서울교육감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현행 선거법은 상대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공표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게 된다.
1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아직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번 1심 판결은 향후 판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지난해 지방 선거 패배 이후 "이번 선거는 끝나지 않았다. 아마 1년 반 후에 다시 선거가 열릴 것"이라던 고승덕 후보의 저주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재판부는 이날 유죄를 선고한 이유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재판부가 긴 호흡으로 읽어 내려간 판결문의 핵심은 "낙선 목적의 허위사실 공표죄는 상대에게 불리한 사실을 공표해 유권자의 올바른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한 대목에 있다. 결국 재판부는 조희연 서울교육감의 허위사실 공표가 단순한 의견표명을 넘어서 유권자의 판단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실 적시로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의 이날 판단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온전히 개별주체의 몫이다. 재판부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판단의 기준과 양형의 밀도가 천양지차를 보이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이를 바라보는 입장 역시 각양각색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재판부의 이날 판결을 존중한다. 다만 한가지 조희연 서울교육감에게 허위사실 공표의 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이것이 교육감의 직을 박탈할 만큼의 심각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재판부는 이날 허위사실 공표가 유권자의 올바른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처벌 대상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지난 서울교육감 선거는 조희연 당시 후보의 의혹제기가 선거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은 상태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유권자의 올바른 판단을 방해해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일반적인 허위사실 유포와는 당시의 상황이 많이 달랐다는 뜻이다.
조희연 후보가 고승덕 후보의 미 영주권 보유 의혹을 제기한 시점은 2014년 5월 25일이었다. 당시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고승덕 후보가 두 자녀를 미국에서 교육시켜 미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고, 고 후보 또한 미국에서 근무할 때 영주권을 보유했다는 제보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조희연 후보의 의혹제기는 (재판부 판단과는 다르게) 선거판세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조희연 후보의 기자회견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그동안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던 고승덕 후보가 여전히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기관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었지만 당시 한국일보와 코리아리서치가 5월 26~27일 이틀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고승덕 후보는 34.3%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문용린 후보(21.7%)와 조희연(16.4%) 후보를 여유있게 앞서고 있었다. 조선일보와 미디어리서치가 5월 30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고승덕 후보는 28.9%로 조희연 후보(17.4%)와 문용린 후보(16.7%)를 크게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조희연 후보의 의혹제기가 유권자의 판단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고승덕 후보가 5월 말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유력한 서울교육감 후보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유권자의 표심을 뒤흔드는 결정적 장면은 외부로부터가 아닌 내부로부터 튀어 나왔고, 이로 인해 고승덕 후보는 자이드롭처럼 순식간에 추락했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조희연 후보의 의혹제기 때문이 아니라 멀리 바다 건너 미국으로부터 들려온 한편의 드라마틱한 글 때문이었다.
선거를 불과 4일 앞두고 고승덕 후보의 장녀인 고희경(Candy Koh)씨는 페이스북에 "아버지는 교육감 자격이 없다"는 장문의 글을 남겼다. 아버지의 '자격없음'을 고백하는 이 글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관련 사실이 알려지자 온라인과 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고승덕 후보의 위선과 이중적 태도를 비난하는 여론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선거 전문가들은 이 장면을 선거 판세를 일순간에 반전시킨 결정적 순간으로 꼽는다. "당신은 서울시의 교육정책을 책임질 교육감의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딸의 고백이 유권자의 표심을 흔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결국 고승덕 후보가 선거 패배의 쓴 잔을 들이킨 것은 조희연 후보의 영주권 의혹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 초래한 부덕의 소치이며 결과였던 셈이다.
물론 조희연 후보가 고승덕 후보의 미국 영주권 의혹을 제기했고, 이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기 때문에 조희연 서울교육감에게 도의적·법적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조희연 후보의 의혹제기가 선거 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고, 설사 그가 허위사실을 공표한 죄(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에 의해 선출된 교육감직을 박탈시킬만큼 중범죄에 해당하는가는 여전히 생각해 볼 문제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허위사실 공표에 의한 명예훼손 죄가 폐지되거나 사실상 사문화된 법규정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반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관련 기소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해당 국가에서 명예훼손 죄를 폐지하거나 사문화된 규정으로 인식하는 가장 큰 이유는 표현의 자유가 제약되고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유독 명예훼손 관련 기소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역행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허위사실 공표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기득권의 권익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는 사회적 강자들의 도구이자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가 높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조희연 서울교육감이 처해 있는 상황도 이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나는 오늘 재판부의 판결을 비난하고 조희연 서울교육감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조희연 서울교육감에게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교육감직을 박탈시킬만큼 심각한 범죄인 것인가를 묻고자 함이다. 글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까지도 의문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조희연 서울교육감의 허위사실 공표가 교육감직을 박탈할 만큼의 중죄라고 판단한 재판부의 판결은 과연 온당한 것인가.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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