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역시나'였습니다. 사실, 온 나라가 떠나갈듯 시끌벅적 난리법석을 떨 때부터 이미 눈치를 챘습니다. 언제는 안 그랬던가요. 여론이 빗발치면 간이며 쓸개며 다 내어줄 것처럼 넙죽 고개를 숙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던 그들이 아니던가요.
무슨 소리냐구요? 정국을 휘몰아쳤던 국회의원 해외출장 전수조사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사퇴와 맞물려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국회의원 해외출장 전수조사 이슈가 정치권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구렁이 담넘어가듯 하는 정치권의 습성이 이번에도 되풀이 되는 것 같아 씁쓸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올라온 '국회의원 위법 사실 여부 전수조사 청원'은 이틀 만에 20만명이 넘는 시민들의 폭풍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김기식 전 원장이 해외출장과 정치후원금 땡처리 문제 등으로 낙마하자 국회의원 전원에 대한 전수조사 요구가 시민사회로부터 가열차게 터져나온 것입니다.
시민들은 이 기회에 정치권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제도 개혁을 통해 투명한 시스템을 구축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문제가 김 전 원장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꽤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오마이뉴스
여론이 거세게 요동치자 정치권은 시민의 요구에 부합하는 듯 했습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자체적으로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야당을 압박했습니다.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도 전수조사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전수조사 반대는 가장 공세적이었던 자유한국당이 유일했습니다.
정세균 국회의장 역시 강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정 의장은 지난달 16일 페이스북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피감기관 지원에 의한 국외출장의 적절성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독립적인 심사기구를 설치하고, 국회의원의 국외출장에 대한 백서제작을 통해 그 내용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며 "조속한 시일 내에 여야 교섭단체간 협의를 거쳐 전수조사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이후 전수조사 이야기는 '쏙' 들어갔습니다. 태풍처럼 맹렬하게 정국을 휘감던 당시와 비교하면 '천양지차'입니다. 전수조사는 이제 정치권의 관심 밖으로 완전히 밀려난 모양새입니다.
물론 관련된 소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 의장은 지난 4일 '국회의원의 직무상 국외활동 신고 등에 관한 규정'과 '국회의원의 직무상 국외활동 등에 관한 지침'에 대한 제·개정을 완료했습니다. 이에 따라 앞으로 피감기관의 경비를 지원받은 국회의원의 해외출장은 원칙적으로 금지될 전망입니다.
다만 국회는 외부기관의 요청으로 해외출장이 필요한 경우에 한해 엄격하고 투명한 절차를 거쳐 지원받을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었습니다. 이와 관련 정 의장은 "이번 제도 개선을 통해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번 조치는 논란이 됐던 국회의원 해외출장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 토대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합니다. 피감기관 지원에 의한 해외출장이 원천적으로 금지됐고, 예외적으로 승인된 경우라 할지라도 결과보고서 제출 의무화와 해외출장 실적에 대한 정례 점검 등의 규제 장치 역시 도입됐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민사회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전수조사와 관련된 내용이 빠져있는 탓입니다. 전수조사는 국회의 잘못된 해외출장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파악해야 올바른 사후대책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회는 과거의 잘못은 덮어둔 채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합니다.
정치권의 이런 모습은 사실 대단히 익숙합니다. 여론을 의식해 갖가지 입에 발린 약속을 남발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야무야 넘어가기가 다반사였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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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현 한국당) 의원들은 "2017년 5월 31일까지 5대 개혁과제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1년치 세비를 기부형태로 반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해 모두 56명의 의원들이 서명한 이 서약은 '대한민국과의 계약'이란 이름으로 당시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새누리당은 해당 광고에서 "국민 여러분, 이 광고를 1년 동안 보관해 주세요"라며 약속 이행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총선을 의식한 이 낯뜨거운 약속은,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한국당 의원들은 5대 개혁과제 법안을 기간 내에 발의했기 때문에 "계약 내용을 이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세간의 시각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4050자유학기제'와 관련된 고용정책기본법 개정안의 경우 약속 시한 하루 전인 2017년 5월 30일 발의돼 세비 반납을 면하기 위한 꼼수 법안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나머지 법안 역시 국회에 계류 중이기 때문에 약속 이행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당시 이와 관련해 여론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세비를 반납한 의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약속을 등한시 하기는 민주당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개원한지 한 달이 넘도록 19대 국회는 원구성 문제로 표류했습니다. 각계로부터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속출했고, 대한변호사협회는 세비 회수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민주통합당(현 민주당)은 그해 12월 의원 세비 30%를 반납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국회의원 수당에 관한 법률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대선이 끝나자 관련 약속은 흐지부지됐고 19대 국회가 끝나면서 법안은 자동폐기됐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의 일환으로 뜨겁게 타올랐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공약'(空約)의 사례는 일일히 거론하기가 벅찰만큼 부지기수입니다. 때로는 선거 전략의 하나로, 때로는 정치공학적 차원에서 무수히 많은 약속들이 의원들의 입을 통해 확대·재생산되지만 그들 중 빛을 보게 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여론의 화살만 피하면 그뿐이라는 습관성 '무책임병'이 국회 내에 만연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회의원 해외출장 전수조사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김 전 원장의 사퇴로 국회의원 위법 논란의 불똥이 국회의원 전체로 옮겨붙을 조짐을 보이자 한국당을 제외한 각 정당들은 전수조사에 찬성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여론의 관심이 줄어들자 역시나 '도로아비타불'입니다. 이제 정치권에서 전수조사를 거론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봤으니 자기 목에 방울을 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은 만신창이가 된 채 낙마한 김 전 원장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와대가 민주당의 도움을 받아 수천 개의 피감기관 중 무작위로 16곳을 정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20대 국회에서 총 167차례(한국당 94차례, 민주당 65차례)의 해외출장이 있었습니다. 이 조사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시민사회가 국회의원 위법 사실 전수조사를 강력하게 요구했던 배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국회의원에 대한 전수조사는 무위에 그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김 전 장관을 거세게 몰아세웠던 국회의원들이 정작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기를 극도로 꺼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도덕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인격 역시 송두리째 발가벗겨졌습니다. 이 극명한 대비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이 결과를 납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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