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주년 광복절이었던 지난 15일,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온통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한 사람은 걸그룹 소녀시대의 멤버 티파니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광복절에 역사 문제로 구설에 올랐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향한 언론과 대중의 반응이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먼저 티파니의 경우를 살펴보자. 티파니는 지난 14일 일본 도쿄 공연을 마치고 난 후 멤버들과 찍은 사진을 SNS에 공개하며 일장기가 붙은 이모티콘을 덧붙였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광복절에 더 큰 문제가 터졌다. 전범기 문향에 '도쿄 재팬'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사진을 SNS에 게시한 것이다.
관련 소식은 언론을 통해 공개됐고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대부분의 언론이 광복절을 즈음해 벌어진 티파니의 역사적 무지를 집중 조명했고, 대중들 역시 티파니를 향해 십자포화를 내뿜었다. 이 과정에서 지난 5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못알아 봐 논란이 됐던 AOA의 설현과 지민도 도매금으로 엮어 나왔다.
사건이 터진 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티파니를 향한 대중의 공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대중들은 티파니가 손수 작성한 사과문이 성의가 없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티파니가 출연하고 있는 방송의 하차까지 요구하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연예인들의 역사적 무지를 탓하는 대중들의 분노는 이처럼 방송의 하차를 요구할만큼 매서웠고 엄격했다.
ⓒ 유튜브 화면 캡쳐
박 대통령 역시 제71회 광복절 기념 축사를 하는 자리에서 역사적 무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장소를 뤼순 감옥이 아닌 하얼빈 감옥으로 말해 빈축을 산 것이다. 수개월 전 설현과 지민이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몰랐다는 이유로 언론과 대중의 뭇매를 받았던 장면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 주류 언론은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설현과 지민, 티파니를 향해서는 사생결단식으로 물어뜯었던 그들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연예인의 역사적 무지를 대통령의 그것과 동일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주류 언론은 연예인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못해 혹독한 비난과 비판을 가했으면서도 박 대통령을 향해서는 굳게 입을 닫았다.
대중들 역시 주류 언론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티파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티파니를 향한 대중의 분노가 '집단구타'라면 박 대통령의 그것은 '딱밤' 수준에 불과했다. 연예인의 역사적 무지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마구 쏟아내는 대중들의 엄격함이 박 대통령을 향해서는 왜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지 의아할 뿐이다.
전범기가 그려진 문양을, 그것도 광복절에 게재한 티파니의 행동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티파니의 역사적 무지가 단지 티파니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설현과 지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몇해 전 모 대학의 디자인학부에서 전범기를 배경으로 하겐크로이츠를 하는 듯한 사진을 제작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장면들이 언제부터인지 우리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이완용을 애국지사로 알고 있는 학생들, 3·1 운동을 '삼점일운동'으로 읽는 학생들, 전범기에 새겨진 역사적 의미를 모르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이 모두 역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역사과목의 근·현대사 비중이 대폭 축소되고, 일본제국주의와 친일부역자를 미화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온 학생들이 역사적 사실에 무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일 터다. 티파니, 설현과 지민에 의해 촉발된 논란의 본질적 원인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 오마이뉴스
언론과 대중의 시선 역시 바로 이 부분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맥점이 숨겨져 있다. 역사적 무지와 역사 인식의 부재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티파니, 설현과 지민의 논란은 어디까지나 역사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다. 쉽게 말해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뜻이다.
티파니도 그랬고, 설현과 지민도 그랬다. 단지 전범기의 의미와 안중근 의사를 몰랐을 뿐, 그들이 전범기를 남다른 의미로 생각하고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여기는 것은 아니다(고 믿는다). 비록 그들의 무지에 대해 손가락질 할 수는 있을 지는 몰라도, 그들의 역사 의식이 부재하다고 섯불리 단정짓고 비난할 수는 없는 이유다. 역사 의식이란 역사에 대한 철학이자 가치관이며, 무지는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그들의 무지가 철학이나 가치관과 동등하게 인식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역사 의식 부재의 비난이 향할 곳은 사실 따로 있다. 친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 헌법이 명문화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유구한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 가치 중립의 역사 문제에 개입해 역사를 새로 쓰려는 사람, 역사를 가족사와 혼동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언론과 대중의 엄중하고 혹독한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역사적 무지와 역사 인식의 부재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하물며 상대는 여자 연예인과 한 나라의 국정을 총 책임지는 대통령이 아닌가.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라. 언론과 대중의 뜨거운 비난이 향할 곳이 과연 어디인지를. 역사적 사실에 무지한 연예인인가, 아니면 무지한 것도 모라자 역사를 권력의 입맛에 맞게 뜯어 고치려는 사람인가. 당신의 분노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 분노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티파니와 박근혜, 누가 더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곰곰히 생각들 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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