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금요일 운전 중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내가 불쑥 "오늘은 미생 볼 수 있겠네"라며 말을 건냈다. 생각해 보니 벌써 금요일이었다. 한 주의 문을 열어 제낀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금요일이었던 것이다. 하루가 정말 빛보다 빠르다. 봄이 언제 왔나 싶었는데 벌써 겨울의 초입에 와 있는 것처럼 시간은 언제나 사람들보다 앞서 달려 나간다. 가는 시간이 조금씩 야속하게 느껴지는걸 보면 이제는 세월의 무게를 느낄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겠지, 누구나 그래 왔던 것처럼.
아내의 말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 나는 '미생'이 일일드라마였으면 좋겠어" 라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물론 나는 상사맨도 아니고, 대기업은 문턱도 밝아본 적이 없다. 따라서 대기업 영업팀 안에서 매일 매일 치열한 삶을 살아 가는 저들의 모습에 감정이 이입될 여지는 사실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매우 흥미롭다. 어쩌면 (무대가 대기업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이 마주하고 있는 삶의 모습이 우리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인간의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배워 왔다. 하루 하루의 삶이 소중한 것이라고 들어 왔다. 세상은 절대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불어 함께 돕고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아름답지 못하다. 하루 하루가 전쟁같은 일상의 연속이다. 때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일년을 살아가는 것보다 어렵게만 느껴진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남을 밟고 일어서야만 한다. 우리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배우고 듣고 알아 왔던 것들과 현실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장그래가 마주 친 현실은 그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그 세계는 사방이 온통 거대한 벽으로 둘러쌓인 곳이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고 도무지 깨뜨릴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그곳에 횡하니 떨어진 장그래는 외톨이였고 고아였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기들은 장그래를 경쟁자 혹은 시기의 대상으로 여겼고, 영업3팀의 동료들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그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이 곳에서도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장그래가 우여곡절 끝에 인턴과정을 거쳐 원 인터내셔널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현실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지금은 고졸에 아무런 스팩조차 없는 인턴이 대기업의 영업팀으로 발령났다면 장안의 화제꺼리가 되는 세상이다. 어쨌든 장그래는 극적으로 기사회생했다. 그것이 우연이든 운이든 낙하산의 도움이든 아니면 장그래의 실력이든 중요한 것은 그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어느새 장그래로 빙의된 우리에게 그는 무조건 살아야만 하는 존재다.
영업3팀의 일원으로 장그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간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장그래의 억세게 좋은 인복이다. 낙하산 줄을 잡고 벌거벗은 채로 정글 속에 떨어진 장그래는 보기드문 사수 김동식 대리와 너무나도 인간미 넘치는 오상식 과장, 아니 차장의 든든한(?) 지원 아래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동료애와 팀웍을 깨달아 간다. 권위와 격식을 깨고 이제 겨우 신입에 불과한 장그래의 의사를 경청하고 이를 취합하는 오 차장과 늘 한결같은 자세로 장그래의 회사 적응을 곁에서 도와주는 김 대리가 없었다면 과연 장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면에서 오늘의 장그래를 있게 만든 일등 공신은 장그래 자신이 아니라 어쩌면 오 차장과 김 대리일지도 모른다.
반상 위에서 때로는 물 흐르듯 유연하게 때로는 맹수처럼 사납게 격돌하는 바둑은 상대가 바로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혼자와의 싸움이다. 그래서 외롭다.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만이 그 슬픔의 깊이와 슬픔의 질감을 이해할 수 있다. 장그래는 언제나 혼자였고 외로웠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인턴기간 중 오 차장은 취중에 동료 과장에게 장그래를 '우리 애'라고 불렀다. 술이 머리꼭대기까지 취해서 내뱉은 오 차장의 모습을 기억하며 장그래는 혼자서 울었다. 그것은 회환의 눈물이자 감격의 눈물이었다. 아마도 이 때부터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던 장그래가 마침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된 계기가. 잠자고 있던 장그래의 포텐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정치 시사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오늘 뜬금없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국가가, 정부가, 사회가, 그리고 공동체가 개인의 내면 속에 숨겨져 있는 가치들이 마음껏 발산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들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단한 알을 깨고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잘 품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와는 정반대로 흘러만 간다. 국가는, 정부는, 사회는, 공동체는 기회를 주기는 커녕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된 경쟁은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되고 이 과정에서 낙오자는 사회적 부적응자로 인식되어 사람 대접조차 받지 못한다. 경쟁에서 한번 밀려나면 어지간해서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가 없다. 세상은 냉혹하고 그럴수록 인간은 비참해져만 간다. 이것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참 모습이다.
신드롬을 일으키며 '미생'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 드라마의 고공행진 원인을 두고 사람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상사맨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샐러리맨들이 저들처럼 치열하게 발바닥에 땀나도록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 몰입하면 할수록 나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 지고 거북해 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장그래에게 일어나는 판타지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인의 고충과 애환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극찬받고 있는 드라마 미생, 그러나 이 드라마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차원이 다른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율배반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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