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희망을 꿈꾸었던 한 사내에 대한 글을 포스팅한 적이 있었다. 그 글에서 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언급하며 현실과 괴리된 상상을 단호하게 망상이라고 규정했다.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희망, 망상에 가까운 꿈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하고 나는 반문했다. 현실성이 결여된 상상. 뜬구름잡는 허황된 이야기. 그저 한번 '피식'하고 웃어버리면 그만인 무의미한 티끌같은 것들.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부유하는 꿈들. 이제 그만 해라. 우리 삶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단다.
어제 지인으로부터 SNS를 통해 기사링크를 하나 전달 받았다. 그가 왜 이런 내용의 링크를 보내왔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주 잠시동안이겠지만 한번 웃어보라고, 이런 즐거운 상상이라도 잠깐 해보라고. 그의 배려에 코끝이 살짝 흔들린다. 그가 보내온 링크를 클릭해 들어가 보니 아주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이 사내 역시 아주 독특한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다. 그 독특함은 사람들에게 줄곧 뜬금없는 황당함으로 인식되어 왔다. 비현실적 망상을 꿈꾸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는 21세기의 돈키호테다.
민주공화당 허경영 총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시한 19대 대선 공약이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지난 1월 22일 작성한 게시글이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현실에 대한 부정과 냉소가 만들어낸 이유 있는 관심과 반응들이다. 인간은 늘 마주 선 현실을 부정하고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존재 아닌가. 하물며 지금이야 말해 무엇하랴.
지인의 바람대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동안 즐거운 상상에 빠져 보기도 했다.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공약들이 이번에는 제법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반응도 가히 폭발적이다. 지금 대선이 치루어진다면 혹시?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일은 단언코 없다. 무뎌진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의 감각도 현실에서는 지독하게 냉정하고 정확하다. 사람들이 그보다 더 잘 안다. 그가 내세운 공약들은 지켜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 씁쓸하다는 것을.
모니터에서 벗어나 잠시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이 실현 가능성이 전무한 허경영씨의 19대 대선 공약에 열광하고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사대강 사업과 자원외교, 방산비리로 낭비된 국민혈세 100조. 이명박과 그 일가 및 측근들을 둘러싼 비리와 부정의 파편들. 민주주의를 한참이나 후퇴시킨 권위적인 국정운영의 상흔들. 이명박을 구속하겠다는 그의 공약은 더할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국정원과 경찰, 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다수의 국가기관이 헌법을 유린하고 대의 민주주의를 파괴시켰던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총장의 옷을 벗기고, 일선 수사팀은 징계 및 좌천. 그에 반해 사건을 주동하고 은폐하며 조작하는데 가담했던 자들은 무죄 및 영전. 국회의 국정조사는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주도 하에 결국 아무런 성과없이 파행.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부정선거의 증거들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리는 비루한 현실. 지난 대선의 불법과 부정들을 다시 수사하겠다는 그의 공약은 숨막히는 전율이 있는 극적인 판타지다.
이 밖에도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적 정당인 새누리당을 해체하는 것,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수당을 남녀 각각 5000만원씩 지급하고 자녀 한 사람당 출산수당을 3000만원씩 지급하는 것,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매월 70만원씩의 건국수당을 지급하는 것(어버이연합 제외), 태반이 쓸데없이 놀고 먹는 국회의원들을 3분의 1로 줄이고 국회의원들을 무보수 명예직으로 하겠다는 공약 등도 충분히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처럼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숨막히는 판타지도 이 질문 앞에 서는 순간 바람빠진 풍선처럼 볼품없이 쪼그라들고 만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구?
서두에 언급했던 뜬구름잡는 이야기, 풍차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그것과 허경영씨의 공약은 묘하게 닮아있다.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그의 공약들이 절대로 이루어질 리 없는 부질없는 희망들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 뜨거운 반응은 대단히 기묘하기만 느껴진다. 비현실적 꿈을 쫓아 모험을 떠날만큼 우리의 삶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언론은 허경영씨의 공약에 주저없이 '황당함'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정확한 지적이며 명확한 표현이다. 바이칼 호수를 서울시에 공급하고, 몽골과 국가연합을 이루고, UN 본부를 판문점으로 이전시키고, 만주땅을 국고로 환수하고, 독도 간척사업으로 일본 근해 500m 앞까지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그의 공약이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황당한 일이다. 일전에 언급했듯이 황당함은 보편적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한 조건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각종 비리 의혹들을 성역없이 수사해서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 국가기관이 개입된 지난 대선의 불법과 부정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 노인복지 문제와 저출산 문제 등의 당면한 과제들이 그저 웃어넘길 황당한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런 것들마저 황당함과 동류로 묶고자 하는 태도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허경영씨의 황당공약을 그저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나는 안다. 허경영씨의 19대 대선공약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이 고단하기 그지없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냉소이자 자조라는 것을. 현실정치에 대한 조롱이면서 풍자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웃을 수가 없다. 웃으면 웃을수록 그 뒤를 따라 마치 떫디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끝모를 비애와 자괴감이 뭉클뭉클 솟구쳐 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황당함과 당연함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지을 필요가 있다. 가벼움과 진지함,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보다 분명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현실정치에 대한 냉소, 풍자와 조롱만으로 정치는, 현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냉소와 풍자, 조롱 이전에 이처럼 비루한 현실을 만든 우리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부끄러움이 먼저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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