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하다. 청와대 내부문건 유출사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강경대응을 보고 필자가 처음 느낀 감정은 이랬다. 이와 같은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어제(1일) 청와대 수석회의를 주재하면서 내보인 발언들은 솔직히 너무나 황당했다. 자기 필요한 말만 하고, 자기 필요한 것들만 기억해온 박 대통령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아무리 익숙해져 있다고 해서 그에 맞춰 감정까지 무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박 대통령은 이날 작심한 듯 '비선실세'인 정윤회씨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는 청와대의 문건유출사건에 대해 서슬퍼런 속내를 내비쳤다. 박 대통령은 논란이 되고 있는 문서유출사건에 대해 "최근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번에 문건을 외부로 유출한 것도 어떤 의도인지 모르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며 "누구든지 부적절한 처신이 확인될 경우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벌백계로 조치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성토했다.
'국기문란', '일벌백계' 등 최고수위의 수사들이 동원된 것을 보면 박 대통령의 진노가 얼마만큼 큰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 속사정이 무엇이든 간에 청와대의 문서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은 매우 부적적할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의 발언대로 '국기문란'에 해당되는 심각한 범죄행위다. 따라서 책임자를 반드시 발본색원하고 그 책임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려야만 한다. 여기까지는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필자가 느낀 황당함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청와대의 문서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이 '국기문란'이고, 반드시 주동자를 색출해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사안이라면 마찬가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불법 유출한 것도 '국기문란'에 해당되고 책임자를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똑같이 청와대 문서가 유출되었는데 한쪽은 '국기문란'의 중대범죄가 되고 다른 한쪽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합리화된다면 이를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라는 건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청와대 비선실세 문건은 그 기밀성과 중대성,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 등으로 보자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과 비교해 한참은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청와대의 문서가 외부로 유출되었다는 점과 이 문서로 인해 정치적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둘은 문서유출로 인한 이해득실의 입장이 뒤바뀌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표면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뒤바뀐 입장의 차이가 이 말도 안되는 황당함을 유발시키는 본질적인 이유로 작동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어떤 이유로, 누구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어떻게 왜곡되고 악용되어 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현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발설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발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발언'은 사실이 아니다. 2007년 남북정상에서 남북정상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의 필요성을 교감하면서 나눈 대화들을 당시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가 악의적으로 날조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의원직은 물론이고 정치생명까지 걸겠다며 비장한 결의를 다지던 정문헌 의원과 서상기 위원 등은 자신들의 폭로가 거짓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적반하장식의 변명으로 일관하며 슬그머니 꼬리 내리기에 급급했고, 문재인 후보에게 책임지라며 목에 핏대를 세웠던 박 대통령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먼 산을 바라보기만 했다.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공히 집권을 위해 정당치 못한 방법을 동원했던 셈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는 집권을 위해서라면 정당한 방법과 과정 그리고 절차쯤은 언제라도 무시해 버리는 저급한 정치, 집권만 하면 과정의 불법과 부정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저질 정치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황당함은 보편적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한 조건반사다. 청와대 문서유출사건에 대한 박 대통령의 반응이 황당한 이유는 대통령의 행위에서 일관성이나 형평성, 공명정대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안의 유불리에 따라 극과 극으로 자유롭게 위치 이동을 하는 박 대통령의 모습 속에는 원칙과 기준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박 대통령은 이번 청와대 문건유출사건을 언급하면서 다시 한번 청와대와 공직사회에 만연된 공직기강의 해이를 질타했다. 그런데 이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정부 들어 공직기강의 해이와 도덕적 문란의 문제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고, 박 대통령이 이 부문을 지적했던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는 청와대와 공직사회의 기강 해이와 도덕적 문란이 결국 정권차원의 문제이며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박 대통령의 문제라는 의미다. 따라서 청와대 대변인이 방미수행 중 성추행 논란을 일으키고, 법무부 차관이 성접대 의혹에 휩싸이고, 지방검찰 검사장이 음란행위로 현장에서 체포되고, 국회의장까지 지냈던 인사가 캐디를 성추행하고, 전직 검찰총장과 현직 군 사단장이 잇따라 성추문을 일으키고, 급기야 청와대의 문건마저 외부로 유출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왜 이 정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박 대통령은 직시해야만 한다.
그동안 박 대통령은 크고 작은 국정난맥의 원인과 책임을 언제나 외부에서 찾았다. 자신은 잘하고 있는데 야당 때문에, 언론 때문에, 사회에 만연돼 있는 적폐들 때문에 국정운영을 제대로 할 수 없고 갈등과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대통령의 책무와 역할을 망각하고 있는 듯한 이같은 인식과 태도야말로 지도자로서 치명적인 결함이자 결격 사유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선비였던 홍응명의 인생관과 철학이 녹아있는 '채근담'은 동양적인 전통의 기반위에서 인간의 사유와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지침서로 유명하다. '채근담'에는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적 리더들이 갖추고 있어야 할 올바른 마음가짐과 처세의 지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 중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라'는 대목은 정치 지도자들이라면 반드시 새기고 있어야 할 덕목 중 으뜸으로 인식된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해지는 순간 독단과 독선에 사로잡히게 되고 오만해지기 마련이다.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는 빠지기 쉬운 유혹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는 물론이고 국가와 국민을 불행하게 만드는 독배와 같다. (왜 그런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박 대통령에게 남에 대한 관대함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스스로에 대해서만큼은 더욱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 한 나라의 국정을 이끌고 있는 최고통수권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채근담'이 강조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일 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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