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 아니라 자유한국당 등 보수야당의 참패다. 6·13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각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보수야당이 너무 못해서 유권자들로부터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보수의 궤멸이 아닌 보수당의 궤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유권자들은 처절한 반성과 성찰, 뼈를 깎는 혁신 없이는 보수야당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보수같지 않은 보수를 심판한 유권자들이 이번 지방선거의 진정한 승자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일 터다.
숱한 화제를 만들어 낸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국당은 기록적인 참패를 당했다. 한국당은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TK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패배했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뤄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경북 김천 단 1곳에서만 승리했을 뿐 11개 지역을 민주당에 내주었다.
2020년 총선의 리트머스 시험지라 할 수 있는 기초단체장과 광역단체 시·도 의원, 기초의원 선거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당은 TK지역을 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민주당에게 압도당했다. 지역기반과 조직이 붕괴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한국당은 이로써 차기 총선에 상당한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됐다.
최근 한국당 내에서 초선의원과 재선의원 등을 중심으로 당의 전면적인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도 이같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차기 총선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 의식이 집단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는 관측이다. 당쇄신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민심에 부합하겠다는 취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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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직후인 14일 김순례·김성태(비례)·성일종·이은권·정종섭 등 초선의원 5명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10년 보수정치 실패에 책임있는 중진의원들은 정계를 은퇴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한국당은 지난 대선과 6·13 지방선거에서 국민의 냉엄한 심판을 받았다. 더 이상 기득권과 구태에 연연하며 살려고 한다면 국민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9일에는 초선의원 30여명이 국회에서 회동을 갖고 당의 위기 극복을 위한 혁신 방안 등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의 사회를 본 김성원 의원은 모두 발언을 통해 "이제는 초선이 앞장서서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며 "당 개혁이나 혁신 부분에서 그동안 초선들이 침묵하고 뒤로 빠졌던 점에 대해 다시 한번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김 의원은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혁신비상대책위원회에 초재선을 많이 참석시켜 당을 개혁하고 혁신할 수 있도록 지도부에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초선의원들은 이번 주 중으로 1박 2일의 워크숍을 열고 당 수습 방안을 계속 논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재선의원들도 18일 별도의 모임을 갖고 지방선거 참패 이후 당 쇄신 방안 등을 숙의했다. 이 자리에서 재선의원들은 당 해체를 포함한 혁신 방안을 놓고 격론을 이어갔지만 뚜렷한 결과물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재선의원들은 추후 모임을 통해 당의 활로를 모색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지방선거에서 표출된 유권자들의 표심에 놀란 한국당의 초·재선의원들은 이처럼 이구동성으로 당의 개혁과 혁신을 요구하고 나서고 있다. 이들은 김성태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의 혁신안이 절차적 민주주의에 위배된다고 비판하며 당 중진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른바 '정풍운동'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당 초·재선의원들의 '정풍운동' 양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대선 패배 이후 홍준표 당시 대표와 서청원·최경환 의원 등 친박계가 인적청산 문제로 진흙탕 싸움을 펼치자 초·재선의원들을 중심으로 정풍운동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초·재선의원 내에서는 국정농단 사태와 탄핵,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서·최 의원이 탈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막말과 사당화 논란으로 당내 갈등을 부추기는 홍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분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정풍운동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다. 초선의원 상당수가 박근혜 정권에서 공천을 받은 '박근혜 키즈'인데다가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구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계파 청산과 혁신을 요구하는 당 안팎의 목소리는 흐지부지 됐고 결국 당 쇄신에 실패한 한국당은 민심으로부터 더욱 유리된 채 역대 지방선거 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이는 초·재선의원 역시 한국당 몰락의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전여옥 전 의원은 16일 페이스북을 통해 초선의원들을 향해 날서린 독설을 날렸다. 그는 "홍 전 대표는 물러났지만 치욕의 역사는 계속될 듯하다"면서 "(홍 전 대표가 인적청산 대상으로 거론한) 리스트 1번부터 9번까지 해당하는 이들이 당 대표를 하겠다고 나서질 않나, 국회의원을 그만둘 줄 알았던 초선들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정풍운동'을 하겠다는데 진짜 이 정도면 '역대급 철판'"이라고 힐난했다.
그는 이어 "지난 총선 때 '진박인증' 모임과 사진까지 제시한 정종섭 의원을 비롯해 초선의원 5명이 '중진들은 정계은퇴하고 결단을 내리라'고 했는데 홍 대표 시절 입 한번 뻥끗도 하지 않았던 이름만 초선인 사람들이 분명히 뭘 잘못 먹었나 싶다"며 "초선도 초선스러워야지 죽은 듯이 있다가 홍 대표가 물러나니 '중진사퇴'. 한국당 초선분들은 '중진 찜쪄먹는 노회한 초선분들이다. 홍 대표의 막말에 버금가는 한국당 궤멸의 진짜 책임자들"이라고 맹렬히 성토했다.
전 전 의원의 신랄한 비판은 최근 초·재선의원들을 중심으로 한국당에서 일고 있는 정풍운동에 대해 여론이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서야 할 때는 내내 침묵하고 있다가 지방선거에서 '폭망'하며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목소리를 내는 이중적 행태에 대해 비판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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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신·정·천'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초·재선의원들의 구 동교동계를 향한 쇄신 요구, '남경필·원희룡·정병국' 등 한나라당 내 소장파가 주도한 세대교체 운동 등은 정풍운동을 거론할 때마다 자주 회자되는 사례들이다. 민심과 괴리된 채 기득권에 안주하는 당내 중진들을 겨냥한 정풍운동은 당시 정치권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며 상당한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다는 평가다.
그러나 한국당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풍운동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그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공감은커녕 당 안팎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당을 향해 무수히 많은 경고음이 켜졌음에도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았던 당사자들이 이제와서 무슨 염치로 당 쇄신과 개혁을 외치고 있느냐는 비판이 거세다. 한마디로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비겁한 행태라는 지적이다.
주지한 것과 같이 2016년 총선 패배 이후 한국당은 전혀 변화가 없다. 민심의 준엄한 심판과 경고가 잇따랐지만 늘 제자리였다. 말만 무성할 뿐 , 반성과 성찰이 없고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국정농단 사태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경험한 뒤에도 다를 바가 없다. 한국당이 대선에서 패배를 하고 지방선거에서도 참패를 당한 실질적인 배경일 터다.
지방선거 이후 한국당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쇄신과 개혁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계파 갈등과 헤게모니 싸움으로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다. 당이 존폐의 위기에 빠져 있는데도 자기만 살겠다고 서로 아우성이다. 초·재선의원들의 정풍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행위의 순수성을 외치기에는 그들의 침묵이 너무 길었다.
한국당은 현재 선거 패배의 책임론과 당 쇄신안을 둘러싸고 자중지란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 하나가 눈에 띈다. '책임'과 '자기희생'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책임과 자기희생 없는 정치의 한계는 명확하다. 보수진영 일각에서 "한국당은 보수가 아니다", "문을 닫는 게 옳다"는 극단적인 쓴소리가 터져나오는 이유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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