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시켜서 물리적 충돌을 해 준비 시간을 끌며 지지층을 결집시키기를 시도하고 사정기관에 흔들리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최종적으로 계엄령까지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도 돌고 있을 정도로 참으로 무지막지한 대통령이다."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의 '박근혜 퇴진' 요구가 들불처럼 퍼져가고 있던 2016년 11월 18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세상이 깜짝놀랄 만한 아주 민감한 이야기를 꺼낸 든다. 요컨대, 절정으로 치닫던 촛불집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군이 동원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헌법 제77조에 명시돼 있는 계엄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제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대통령이 선포할 수 있는 국가긴급권의 하나다. 계엄이 선포되면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이 사실을 통고해야 하며,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할 시 이를 해제해야 한다.
추 대표의 '계엄령 준비' 발언이 알려지자 청와대와 새누리당(현 한국당)은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정연국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제1야당의 책임있는 지도자가 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한 정치적 선동"이라며 강하게 유감을 표명했고,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공당의 대표가 전혀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를 공식적으로 이렇게 퍼트릴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추 대표의 발언을 '선동'이자 '유언비어'로 단정지었다. 사실 그 길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시는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 수 백만 명이 주말마다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던 시기였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정권이 무너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군사정변을 떠올리게 하는 군 동원 의혹까지 불거졌으니 서둘러 진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날선 공방이 이어졌다. 그러나 계엄령을 둘러싼 소문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은 채 사그라들었다. 맹렬히 타오르던 촛불집회의 열기가 모든 이슈를 집어삼킨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기저에 '설마' 하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21세기에 군이 시대를 거꾸로 돌리는 시대착오적 발상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 오마이뉴스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는 국군 기무사령부의 '계엄령 검토 문건' 파문은, 그러나 이같은 생각이 얼마나 순진하고 '나이브'한 것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뜬금없게 여겨졌던 추 대표의 주장은 점점 사실로 드러나는 모양새다. 20일 청와대가 공개한 67쪽 분량의 '계엄 대비계획 세부자료'는 당시 기무사가 아주 치밀하게 계엄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준다.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기무사는 12·12 군사정변과 광주민주화운동 계엄령 선포 당시와 흡사한 비상계엄 담화문을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반적인 계엄 시행 규칙과는 달리 계엄사령관은 합참의장이 아닌 육군참모총장이 맡도록 했으며, 계엄과 동시에 방송사와 언론사, 인터넷 여론을 장악하는 세부 방안까지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기무사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과 여의도 등 주요 집회장소에 기갑여단과 특전사 등으로 이루어진 계엄군을 탱크와 장갑차 등을 이용해 신속하게 투입하는 계획도 세웠다. 심지어 문건에는 국회가 계엄 해제를 요구할 것에 대비해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들을 표결에 불참하도록 하고, 야당 의원들을 반정부 활동 세력으로 몰아 검거하는 방식으로 의결 정족수를 무산시킨다는 내용까지 들어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무사 문건이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 당시 시나리오와 기막히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전사 등 군 병력에 의한 시민 강제 진압, 국회 무력화를 위한 야당 정치인 구금, 언론 통제와 장악 등의 세부 계획은 비상계엄을 통해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 과정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이는 공개된 문건이 촛불시위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을 가정해 만든 '소요사태 대비 문건'일 뿐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수야당, 그 중에서도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반응이다. 시민사회와 각계 인사들이 기무사 문건에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짓밟으려는 군의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한국당은 기무사 문건의 의미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기무사 문건은 조선시대로 치자면 '역모'를 모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역모'는 모두가 다 아는 것처럼 실행여부와 상관없이 발각이 되는 순간 가문이 풍비박산나는 대역죄 중의 대역죄다. 한국당은 이 엄청난 사안에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군 계획의 일부로 등장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기무사 문건의 작성 경위와 배경,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해야 마땅할 터다.
그러나 한국당은 그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작전에 투입되는 대상과 이동계획, 언론사 통제와 장악, 계엄 이후의 국회 무력화 방법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인 실행계획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기무사 문건 어디에도 쿠데타 흔적은 없다"(김성태 원내대표), "좌파 정부가 대북 무장 해제에 앞서 군마저 무력화시키려는 것"(김태흠 의원), "군은 국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정갑윤 의원)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2·12 군사정변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무사 문건의 충격적인 내용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인식과 태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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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당의 황당함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음모 사건 당시의 행태와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진다. 이 전 의원의 내란음모 의혹이 불거지자 새누리당은 즉각 유일호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충격과 공포감마저 느낀다"며 총공세에 나섰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이 문제는 여당과 야당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알려진 게 사실이라면 이 의원을 포함해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한 것"이라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엄중한 수사를 촉구했다. 심지어 김진태 의원은 한 방송에 출연해 "제 주위에서는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다"며 "만약 그게 성공했다면 내란음모에서 끝나지 않고 대한민국이 없는 것"이라며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BB탄총과 압력밥솥 폭탄으로 혁명을 꿈꿨던 이 전 의원을 향해 내란을 주동했다며 맹공을 펼치던 그들이 정작 기무사의 계엄 모의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내비치고 있다. 장난감 총을 개조해 북한과의 전쟁 발발시 대한민국의 주요거점에 타격을 입히자는 이 전 의원의 몽상과 구체적인 세부계획이 망라된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문건 중 어느 쪽이 더 섬뜩한지는 물어보다 마나한 문제다. 이 전 의원의 계획이 우주정복을 꿈꾸는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망상 수준이라면 기무사 문건은 완전무장한 군을 동원하는 것에서부터 계엄 선포 이후의 계획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무사 문건에 시민들의 분노와 충격이 가시질 않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 요구가 각계로부터 터져나온다. 군사정변의 비극을 두 번씩이나 뼈저리게 경험했던 탓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당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유린하려는 계획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기무사 문건이 소요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검토 문건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총칼, 장갑차와 탱크, 언론 장악과 통제, 국회 무력화 등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한 끔찍한 악몽이 다시 재연될 뻔했는데도 말이다. 기무사 문건이 누구 말처럼 "그게 성공했다면 내란음모에서 끝나지" 않을 심각한 국기문란 모의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장난감 총에 그 난리법석을 떨던 이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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