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적은 없다. 심지어 먼 발치에서조차 본 적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늘 가까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반갑게 안부 인사라도 건네야 할 것 같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만큼 그는 모두에게 아주 친숙한 사람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TV, 라디오, 신문, 팟케스트 등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의 부재가 믿겨지지 않는 이유가.
수많은 정치·시사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있는 요즘, 그는 섭외대상 1순위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대중들의 막힌 곳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청량제와 같았다. 달변가인 그는 해박한 지식은 물론 유머와 위트 있는 입담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복잡난해한 사건과 이슈를 단칼에 정리해버리는 촌철살인의 비유는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삽결살을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커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는데 1만명만 평등한 것 아닙니까", "냉면집 주인이 '나는 대장균에게 속았다. 대장균 단독 범행이다'라고 얘기하는 겪입니다". 너무 많아 지면에 다 옮길 수 없는 수많은 비유들이 그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는 늘 화제를 몰고다니는 '어록제조기'였다.
ⓒ 오마이뉴스
번뜩이는 재치와 걸죽한 입담으로 사람들을 웃고 울렸던, 평생을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에 헌신하며 진보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왔던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우리 곁은 떠났다. 너무나 갑작스런 황망한 소식에 사람들은 비통에 빠졌고 큰 충격에 빠졌다. 진보정치의 상징과도 같은 노 원내대표의 죽음 앞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문희상 국회의장, 각 정당 관계자 등 정치권, 각계각층의 애도 물결이 끊이질 않고 있다.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지는가 하면, SNS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하다. 정치혐오와 불신이 만연한 시대,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많아온 노 원내대표이기에 이같은 추모의 정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 원내대표가 일궈낸 정치적 공적은 한 두가지로 요약할 수 없다. 그는 평생을 노동과 진보적 가치를 위해 투쟁해온 진보정치의 산증인이자 역사였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며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노 원내대표는 진보정당의 대중화를 위해 누구보다 노력해온 인물이다. 특히 200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이후 척박한 진보정치의 싹을 틔우기 위해 매진해왔다.
정의당의 지지율이 제1야당인 한국당과 엎치락 뒤치락할 정도로 지지세가 확장된 데에는 노 원내대표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노 원내대표는 정계 진출 이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진보정치의 토양을 넓히기 위해 부단히 경주해왔고, 대중들과 가까이에서 소통하고 교감하며 진보정당의 대중화를 선도해왔다.
불의·부정과는 과감하게 맞서 싸웠다. 노 원내대표는 삼성 등 재벌·대기업과 검찰·국정원 등 주류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강단있게 싸워왔던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다. 장애인·여성·성소수자, 노동자·서민 등을 위한 다양한 법률안을 발의하며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서왔던 것도 그였다. 비록 드루킹 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은 인정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족적을 더 많이 기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 원내대표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애도하고 있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그와는 다르게 반응하는 이들도 있다. 23일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의 보좌관 정모씨는 페이스북에 노 원내대표의 죽음을 조롱하는 듯한 사진과 글을 올렸다.
정씨는 이날 페이스북에 "잔치국수 드디어 먹었다. 오늘 저녁 못 드신 분 몫까지 2인분 먹었다. 매년 7월 23일을 좌파척결 기념일로 지정하고 잔치국수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지난해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인용 직후 노 원내대표가 SNS에 올린 글을 그대로 인용하며 고인을 욕보인 것이다.
정씨의 조롱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노 원내대표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권침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신문지 위에 누워있던 사진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바닥에 누워있는 노 원내대표의 사진을 통해 정씨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다. 정씨는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게시물을 삭제했다.
곽상도 자유한국당 의원 역시 부적절한 글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곽 의원은 24일 페이스북에 노 원내대표를 애도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곽 의원의 본심은 이내 드러났다. 그는 "진보정치의 이중성을 본 것 같아 애잔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이중성을 드러내도 무방한 그 곳에서 영면하시기 바란다"고 적었다. 표면적으로는 "애도를 표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진보정치를 비판한 셈이다.
곽 의원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 불법 자금의 10%가 넘으면 사퇴하겠다고 약속했는데 10%를 넘었음에도 사퇴하지 않았다"며 "진보정치의 이러한 이중적인 형태는 결국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수단은 상관없다는 목표지상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적기도 했다. 애도를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트집을 잡겠다는 건지 당최 모를 이 글 역시 논란이 커지자 삭제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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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언론 역시 노 원내대표 사망소식을 전하며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 씁씁한 뒷맛을 남겼다. <조선일보>는 24일 "노회찬의 마지막 후회"라는 기사를 1면으로 내보내며 부제목 역시 "경공모 돈 4000만 원을 받아,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과 "드루킹 불법 정치지금 수수 의혹 받던 중 투신"으로 뽑았다. 노 원내대표의 정치자금 수수 의혹에 기사의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다.
<중앙일보>도 다르지 않았다. "4000만원 어리석었다, 노회찬 유서 남기고..."라는 1면 기사에서 노 원내대표가 드루킹 측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을 부각시켰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였다. "경공모 돈 받았다 어리석은 선택 책임"이라는 1면 기사를 통해 노 원내대표가 '경공모'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보수언론의 이같은 논조는 노 원내대표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그가 걸어온 발자취와 업적을 조명하는 데 촛점을 맞춘 경향·한겨레 등 다른 언론들과 궤를 달리한다. 노 원내대표의 죽음이 드루킹과 얽혀있는 만큼 다분히 이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보수언론의 그간의 보도행태를 아무리 감안한다 해도 씁쓸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정치자금 수수 혐의가 무겁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산 자들의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말하려는 것이다. 노 원내대표가 받고 있는 혐의보다 훨씬 더 큰 부정·비리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이 당당히 활개치고 다니는 것이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과 진보정치의 대중화를 위해 평생을 달려온 그가, 부당한 권력에 맞서 노동자·서민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그가 조롱을 받고, 정치적으로 악용을 당하고,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사안으로 인해 명예가 실추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한 생명이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했다. 진영논리를 떠나서, 호불호를 떠나서 죽음은 슬픈 것이다. 적어도 사람 목숨을 가지고 이래서는 안 된다. 망자에 대한 예의는 누가 가르쳐야만 아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가 지니고 있을 기본적인 품격에 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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