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강원도의 모 대학 디자인학부가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독일 나치의 거수경례를 하는 사진을 만들어 큰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논란이 커지자 해당학교 디자인학부 학생회장 및 임원진이 '욱일승천기를 형상화하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며 사과를 했지만 그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단순 헤프닝? NO, 이는 역사교육의 부재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출처:구글이미지>
필자는 역사과목을 참 좋아했다. 학력고사 시대를 보냈던 필자에게 역사과목은 국·영·수를 제외하면 가장 큰 점수인 25점을 얻을 수 있는(거의 틀리지 않았으므로) 영양만점의 효자과목이었다. 필자에게는 고대사와 중세사 및 근·현대사를 통해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복기하고 그 시대의 인물들과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 없었다. 마치 한 편의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고 다녔던 그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역사적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배경 및 관련 인물들에 대한 웬만한 정보들은 아직도 기억 속에 뚜렷이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필자가 역사를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역사과목이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하루에 한시간 정도의 수업이 매일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학창시절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역사과목에 대한 단상을 끄집어 내는 것은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욱일승천기 논란'이 역사교육의 부재로 인한 예고된 논란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으니 당연히 학생들이 역사적 사건과 배경에 대해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급기야 이와 같은 논란이 발생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무지하기 때문에,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차라리 저 학생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교육환경과 정부를 먼저 탓해야 하는 것이 맞다.
■ 영국의 스시회사 로고까지 바꾼 영국 유학생
역사적 사건과 배경에 대한 무지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는 외국의 사례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불과 얼마 전 영국에 유학중인 한국유학생으로 인해 스시(초밥) 회사가 사용한 욱일승천기 로고가 바뀐 일화가 소개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영국 스시도시락 라이징선, 회사로고를 교체준비 중이다. 출처:조선일보>
이 학생은 영국의 한 편의점에서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사용한 도시락을 발견하고, 이 회사에 '당신 회사가 쓰고 있는 로고는 일본이 2차세계대전 당시 쓴 깃발로 유럽의 나치기와 똑같은 전쟁범죄를 상징하고 있다. 아래 첨부한 자료를 읽어보고 이름과 심볼을 바꾸어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회사는 곧 답장을 보내왔고 이 답장에는 '우리 로고에 그런 문화적 배경이 있는지 몰랐다. 첨부한 글을 읽으며 아주 끔찍했다. 우리의 무지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빠른 시일 내로 로고를 바꾸겠다. 이런 사실을 알려줘서 고맙고, 사과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회사 CEO의 답장을 보면 역사적 지식과 배경이 없는 상태에서 '욱일승천기'를 자사제품의 로고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같은 일은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 정찬성 UFC 웰터급 챔피언 생피에르에게 사과를 받아내다
UFC에서 '코리안 좀비'라는 닉네임으로 맹활약 중인 정찬성 선수는 UFC 웰터급 챔피언인 생피에르(캐나다)에게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평소 생피에르는 일장기를 상징하는 빨간 원에 한자로 '필승'이라고 쓰인 머리띠와' 욱일승천기'를 상징한 도복을 즐겨입는데 이를 정찬성이 거듭 지적했던 것이다. 정찬성은 '당신의 욱일승천기 도북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아시아인들에게 그 깃발은 전범의 상징이나 하켄트로이츠(나치 깃발)와 동일하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진심어린 사과를 한 번도 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아무런 보상없이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러 서양인들은 전범과 비극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로 디자인된 도복을 기꺼이 입는다. 참 어이없다'란 메시지를 트의터에 남겼다. 정찬성의 쓴소리에 생피에르와 해당 도복을 제작한 하야부사는 사과를 하게 된다. 특히 하야부사는 '우리는 세계 곳곳 모든 고객들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한다. 문제의 도복을 판매하지 않고, 앞으로도 제품 제작을 할 때 신중하게 고려하겠다. 이번 일로 상처받으신 분들께 사과드린다'며 앞서 소개한 영국 스시회사와 마찬가지로 재발방지에 힘쓰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생피에르와 하야부사 역시 역사적 사실과 배경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다. 모르니까 사용하는 것이고, 모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물론 일본 극우세력들과 같이 이를 알고도 사용하는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거꾸로 가고 있다
SBS 뉴스는 어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고 있는 '욱일승천기'를 꼬집으며 근·현대사 축소 문제와 역사교육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꼭지를 방송했다. 위에 사례를 들었던 외국회사의 경우와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해당 방송의 인터뷰 내용을 옮겨보겠다.
<이는 역사 교육의 부재가 빚어낸 참상이다. 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
어처구니 없고 놀라울 따름이다. 세상에나, 이완용이 일제에 맞서 싸우고 우리나라를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준 사람이란다. 삼일운동을 삼점일운동(어느 높으신 분을 닮아가는건가?) 이라고 읽는다.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는 없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사실 따로 있다. 한국 학생들의 인터뷰 내용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해 주어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에 있다. 외국회사의 경우 역사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즉각 사과하며 수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들은 이들과는 다르다. 역사적 배경을 가르쳐 주어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학생들의 태도는 씁쓸하다 못해 충격적이다. 이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기성세대들은 과연 도대체 우리나라의 역사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약 두달 전에 교육과학기술부가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재입법한 것을 비판하는 글을 포스팅한 바 있다.
☞ 뉴라이트의 역습, 역사가 뒤바뀌고 있다 ☜ (클릭)
또 지난 3.1절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재산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렸지만 해방이후 기득권세력으로 편입된 친일파들에 의해 다시 핍박받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다룬 글을 포스팅하기도 했다.
☞ 자식들아 절대로 나라위해 목숨걸지 말아라 ☜ (클릭)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선조들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마음을 깊이 새길 수 있는 교육적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할 정부는 정작 역사과목, 그중에서도 근·현대사 과정을 대폭 축소하고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섰던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비루한 삶을 전전하며 정당한 보훈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몇십년 후엔 김구와 안중근은 정말 테러리스트로 인식될지도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우리가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래서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다면,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역사는 무슨?', '국·영·수 하기도 벅찬 판에 역사는 무슨?'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암울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대한민국의 미래인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있는 우리가 일본극우세력들이 추진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왜곡 움직임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분노하고 규탄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역사 교육이 왜 이렇게 망가져버렸는 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유를 다들 알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가다간 몇 십년이 지나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 땅에서 사라지고 나면 모 극우인사의 망언처럼 '김구선생'이나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답하는 학생들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을 듯 하다. 강원도 모 대학의 디자인학부 학생들이 제작했다는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한 나치인사퍼포먼스 사진, 어린 학생들이 '이완용'을 우리나라를 해방시킨 사람으로 답하는 모습 속에 그 전조가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현재도 없다
역사왜곡과 수정을 주도하고 있는 특정세력들의 움직임에 손놓고 있는 정부와 논란이 붉어질 때에만 간헐적으로 뜨거워지고 이내 식어버리는 국민여론과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별다른 대책이 없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아마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바쳤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안중근 의사는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저 말은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말했던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역사를 잊고 있는가? 아니면 지키고 있는가? 이 질문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다시 되돌아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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