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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우리가 알던 천정배는 어디로 사라졌나

29일 국민의당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가 사퇴했다. 김수민·박선숙 의원과 왕주현 사무부총장 등이 연루된 4·13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수수 의혹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검찰의 수사를 좀 더 지켜보자는 신중론과 그에 앞서 과감하게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강경론이 혼재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결국 사퇴를 선택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안 대표였다. 그는 29일 오전에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사퇴의사를 표명했고 천 대표가 이에 동조하면서 두 사람의 사퇴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와중에 최고의원들 사이에 격한 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안 대표의 사퇴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두 사람의 사퇴 이후 언론의 관심은 온통 안 대표에게 쏠리고 있다. 전격적으로 사퇴를 결정한 배경과 향후 전망, 사퇴가 그의 대권 가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집중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당 내에서 안 대표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 안 대표와 함께 국민의당 지도부를 이루었던 천 대표는 동반사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물론 천 대표의 존재감이 무색무취에 가까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야당의 유력한 정치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 대표의 과거를 생각하면 그의 처지가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천정배가 누구던가. 목포 3대 천재라는 평을 받으며 장안의 화재를 불러 모았던 수재 중의 수재가 아니던가. 서슬 퍼런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법관 임용을 단호하게 거부했던 강단과 올곧은 심지를 지닌 인물이 아니던가 말이다.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는 또 어떠했나.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노무현의 진가를 가장 먼저 발견해 낸 혜안을 드러낸 것도 그였고, 동교동계의 구태에 맞서 '정풍 운동'을 주도하며 정치사에 남을 국민경선제와 상향식 공천을 도입시킨 주역이 아니던가.

2010년에는 한나라당( 현 새누리당)의 미디어법 날치기에 미련없이 의원직을 내던지며 원외투쟁에 앞장섰던 투사였고, 이 기간 동안 쌓인 12천만원의 세비 수령을 보기 좋게 거부하는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 아니었던가.


ⓒ 오마이뉴스



이처럼 남다른 소신과 보기 드문 강직함으로 국민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천 대표는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 탈당에 이은 국민회의 발족, 국민의당과 합당 과정을 거치며 우리가 알고 있던 '천정배'의 모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국민의당과의 합당 과정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애초 그는 DJ의 정신을 계승하고 호남정치를 복원하기에는 그 정체성이 모호하다며 국민의당을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당에 합류한 더민주 탈당파 호남의원들을 구태 정치인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돌연 자신의 입장을 바꿔 국민의당과의 합당(정확히는 합류, 더 정확히는 투항)을 선언했다. 4·13 총선을 앞두고 위기감을 느낀 천 대표가 정치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합당의 이유로 호남정치의 복원과 국민 통합, 그리고 새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가 내세운 명분은 전혀 공감을 얻지 못했다. 국민의당의 정체성을 문제삼으며 호남의원들을 혁신 대상이라 지목했던 그의 갑작스런 입장 변화가 설득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가치와 비전, 철학은 이처럼 하루 아침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결단이 공감을 얻으려면 적어도 합당에 대한 명분과 당위가 충분히 제시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국민에게 이 부분을 전혀 납득시키지 못했다. 천 대표가 고수해왔던 원칙과 소신이 무너진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국민의당과 국민회의의 합당은 어디까지나 총선을 앞둔 정치공학의 산물이었다. 4·13 총선을 앞두고 호남지역의 민심이반에 고심하던 국민의당과 존재감이 전혀 없었던 국민회의 간의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 대표가 사실상 국민회의에 단신 투항한 상황에서 당내 지분이 없는 그에게 힘이 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후 사안마다 안 대표에게 끌려다니는 들러리로 전락하고 만다.


ⓒ 오마이뉴스



대표직에서 물러난 두 사람의 운명은 앞으로도 첨예하게 갈릴 것으로 예측된다. 사퇴를 주도한 안 대표는 국민의당의 최대 주주답게 여전히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반면, 천 대표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해질 전망이다. 국민의당에서 안 대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대표직 사퇴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비하다. 


그러나 천 대표는 다르다. 그로서는 사퇴 이후의 뚜렷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합당 과정에서 국민회의 측 인사 대부분이 천 대표와 결별해 당내 세력이 거의 없는데다, 향후 당 수습 과정에서 정동영 의원이 전면에 나서거나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영입될 경우 그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어든 당내 입지보다 그를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그를 향한 국민의 냉담한 시선이다. 원칙과 소신을 갖춘 정치인으로 평가받으며 전국을 호령하던 과거와 비교하면 오늘날 그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냉정하다 못해 한기마저 느껴진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미래가 대단히 불투명한 이유다.

그는 한때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신망 높은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는 우리가 과거에 알고 있던 '천정배'와는 수십억 광년의 괴리가 있다. 외피는 동일하나 내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인 것이다. 우리가 알던 총기와 강단의 정치인 '천정배'는 과연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리고 무엇이 과거의 '천정배'로부터 그를 유리되도록 만들었을까.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이는 '천정배'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정치 전반에 걸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가 낡은 구태와 관성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천정배'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든 원인을 찾아 도려내야 한다. 낡고 닳아  3류 막장이라 불리는 정치가 달라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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