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이 괴상한 용어를 대한민국 내에서만 즐겨 사용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왜 괴상한고 하니 자유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의 자유권이 민주주의의 개념 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굳이 저 둘을 같이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같이 쓸 필요가 없는 개념을 부득불 써야 한다면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란 근대 시민의 기본권 중 하나인 'Liberal'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시장경제체제, 즉 시장주의의 'Free'를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침해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자유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제이념인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의 자유를 뜻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같은 '자유'가 되지만 'Liberal'과 'Free'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간극이 크다. 같은 말, 그러나 완전히 다른 뜻의 자유민주주의는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는 본래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시장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한 개념인 자유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유독 널리 사용되는 까닭은 우리정치체제가 시민의 권리인 'Liberal'보다 시장의 'Free'를 더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이 나라에는 자유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야 할 절대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절반이 넘는다. TV나 언론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를 부인하는 것을 용납치 않겠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 "자유민주주의 훼손을 용납치 않겠다" 등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대개가 새누리당 소속의 정치인이거나, 교과서 왜곡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뉴라이트 출신이거나, 우리나라의 사회와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거나, 보수정부를 위한 든든한 후방지원세력인 관변단체들이다.
TV와 언론에서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맹활약 덕분에 국민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주의가 본래의 개념인 'Liberalism'과는 전혀 다르게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이는 완전한 가치전도이자 완벽한 페이스오프다. 시장주의가 내세우는 'Free'는 자본가와 기득권세력의 특권과 이익을 강화시켜주는 강력한 촉매제이지 시민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개념 파악이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누구의 목소리와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와 같은 몰이해와 무개념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변종 자유민주주의가 성행하는 이유는 북한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변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시로 내세웠던 과거의 독재정부들은 반공을 위해 자유를 부르짖었다.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의 절대가치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공산주의의 반대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이는 세뇌교육의 끔찍한 부작용이다. 위정자들이 체제와 정권유지를 위해 고안해 낸 생경하기 짝이 없는 자유민주주의가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해 이 땅을 반세기가 넘도록 지배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가.
지난 19일 헌재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결정을 내렸다. 본 글에서 헌재의 판결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민주주의가 죽었느니 뭐니 하면서 비분강개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지난 대선의 선거부정사건으로 사망한지 이미 오래다. 이미 죽어 가죽만 덜렁 남아 있는 민주주의가 다시 죽었다며 깨방정을 떠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솔직히 더 분통터지는 일이다. 우리는 근조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잘못된 개념을 마치 진리인양 내세우며 본질을 호도하는 위정자들의 위선과 기만까지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헌재의 결정이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유민주주의가 등장한다. 언급했듯이 자유민주주의를 떠들어 대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다. 국가권력이나 기득권을 시민의 권리보다 우위에 두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통해 반사이득을 보려는 자들이 그 하나요, 민주주의의 반대가 공산주의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이들처럼 시쳇말로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다른 하나다. 박근혜 대통령도 필경 저 두 부류 중의 하나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민주주의란 용어 자체가 서구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 생소한 합성어에 불과한데다 그 의미조차도 잘못 오용되고 있는 개념이라는 데에 있다. 정치학자들은 물론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서도 용어 사용의 적법성 여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논란의 개념을 박 대통령은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내야 사실 뻔한 것이지만 나는 박 대통령이 "역사적 결정"이라 극찬한 헌재의 판결에 세계가 보내는 우려와 비판, 그 싸늘한 조롱의 시선을 그녀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자유민주주의의 오용과 혼란을 막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한 방법은 의외로 쉽다. 자유민주주의에서 그저 '자유'를 지워버리기만 하면 된다. 정말 간단한 일이다. 단순히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만 지워버리면 민주주의의 핵심적 의미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특히 공산주의의 반대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같은 용어 정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공산주의의 반대 개념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반대는 도대체 뭘까. 간단하게 말해 민의에 반하는 권위주의체제는 모두 이에 해당된다. 선거를 통해 사회구성원 다수의 의사를 확인하고 이를 실현하는 정치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에서 강조하는 국민의 주권을 침해하는 독재정치, 철인정치, 신권정치 등의 권위주의체제가 모두 민주주의에 반하는 정치체제다.
이명박 정부 이후로 대한민국은 권위주의체제로 회귀했다. 이와 동시에 우리사회 이곳 저곳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이상신호가 터져 나왔다. 지난 대선은 위태롭던 이 땅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벼랑 끝으로 추락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집권한 박근혜 정부에서 반민주적 정치행위가 일상화되고 있는 것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죽어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나라였다면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이 자행되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가 만고의 진리로 대접받고 있는 나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는 시장주의가 신성시되는 반면 시민권은 찬밥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반공의 기치 아래 언제고 통합진보당 해산같은 기상천외한 일들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에서 보여주었던 반응들, 민의에 반하는 인사와 그에 따른 난맥들, 보수언론조차 고개를 흔드는 독단과 독선적인 국정운영들, 각종 논란에 대응하는 방식들, 그리고 통합진보당의 정당해산에 이르기까지 기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박근혜 대통령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헌정사상 초유의 정당해산을 두고 박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이 확고하게 지켜냈다던 자유민주주의가 지켜지면 질수록 어찌된 영문인지 이 땅의 민주주의는 점점 더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되어만 간다. 박 대통령이 철썩같이 믿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공공해지면 질수록 시민들의 권리는 나날이 쪼그라 들어만 간다. 박 대통령은 이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은 사회공동체를 향해 대단히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진짜 적은 누구인가, 라고.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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