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앰네스티의 살릴 셰티 사무총장은 지난 2월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1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살릴 셰티 총장은 이 서한을 통해 한국정부가 국민 모두의 인권이 보장받을 수 있도록 사형제도, 결사의 자유, 국가보안법, 무기거래조약, 밀양 송전탑 문제의 해결에 노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특히 그는 한국정부의 국가보안법 적용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는 "통합진보당 당원에게 국가보안법 제7조가 적용되어 이들이 북한 사상을 찬양하고 또는 선동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고, 이 재판이 현재 진행중인 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청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데 우려하고 있다"며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심사청구 사건을 거론했다. 세계 최대의 인권단체가 대한민국의 인권상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은 그저 넘길 사안이 아니다.
어제(25일) 대법원은 대한민국의 인권상황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판결을 내렸다. 1981년 부산에서 일어난 용공조작사건인 '부림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고호석(58), 설동일(58), 이진걸(55), 최준영(62)씨 등 5명에 대해 무죄를 확정한 것이다. 이들은 무려 33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국가로부터 자신들의 무죄를 확정받을 수 있었다. 강산이 세번이나 바뀌도록 이들에게는 '국가의 존립과 안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딱지가 붙어있어야 했다.
국가보안법의 낙인은 옥살이를 마친 이후에도 벗겨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붙여진 빨간 딱지는 지워지지 않는 멍에였고 풀리지 않는 족쇄였다. 변변한 직업을 구할 수도 그렇다고 어디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국가는 그들을 국가보안법이라는 단단한 철책 안에 위리안치시켰다. '국가의 존립과 안전, 자유주의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실체불명의 문장때문에 그들은 자그만치 33년이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1948년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작위적이고 모호하기 그지없는 저 문장의 주술에 걸려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는 국가를 그리고 권력자를 절대선으로 인식하는 국가주의자들이 만들어낸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이날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확정 판결을 받은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오용과 남용의 위험성이 있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낯익은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들은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철권통치를 폈던 전두환 군사정부에 맞서 '부림사건'의 피해자 19명의 변호에 앞장섰던 노무현•이홍록 변호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피해자 중의 한사람인 고호석씨는 "요즘이 1980~90년대 공안정국과 닮아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불안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서 기쁘다. 노무현 변호사께 감사한다"는 소회를 밝혔다. 공안정국의 피해당사자가 현 시국을 그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은 박근혜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의 거친 질감을 나타내는 방증이다.
불의에 대항한다는 것은 항상 용기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공공의 안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선량한 시민들의 희생을 제물삼아 절대권력자의 권력유지와 채제의 안정을 도모해왔던 자들에게 맞서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부시절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국가폭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쫓고 있는 이상과 가치를 위해 소중한 것들을 기꺼이 내어준 사람들이었다.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을 변호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잘나가던 조세변호사의 길을 포기하고 무모하고 위험천만해 보이는 시국사건의 변호인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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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너무 당연해서 너무 뻔해서 잊고 사는 것들이 있다. 늘 붙어사는 가족들이 그럴 것이고, 매일 마시는 물이며 숨쉬는 공기가 그럴 것이고, 따갑고 강렬한 햇빛이 그럴 것이다. 민주주의적 가치들도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말하고 시민주권을 말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되뇌이지만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쉽게 잊어버린다. 너무 당연해서 그렇다. 너무 뻔해서 그렇다. 너무 비겁해서 그렇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어떻게 화답을 할 것인지는 각자가 처한 환경과 개별주체의 의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과 기본권 등이 이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시대의 불의와 권력의 폭압에 의연하게 맞섰던 사람들의 분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하자. 기억할 수 있다면, 최소한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잠자고 있는 공적인 분노는 언젠가는 반드시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4•19가 그랬듯이, 87년 민주화투쟁이 그랬듯이, 2008년 광화문의 촛불이 그랬듯이.
2014년 9월 25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용공조작한 '부림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에서 피해자들의 무죄를 확정판결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33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다. 국가주의자들의 거악에 맞서 이 사건을 변론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늘의 결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시대, 보편적 상식과 원칙이 무너진 시대, 민주주의의 가치들이 크게 위협받는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문득 깊게 패인 그의 주름과 구성진 사투리가 눈물나게 그립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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