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이탈리아 해킹 프로그램 제작업체인 'Hacking Team(해킹팀)'으로부터 원격감시시스템을 구입해 불법 사찰논란에 휩싸인 가운데 이를 주도했던 국정원 직원이 자살을 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8일 국정원 직원 임모씨가 자신의 집에서 약 13Km 떨어진 경기도 용인시의 한 야산에서 승용차 안에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는 유서를 통해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며 국정원의 불법사찰이 정치공세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이어 "외부에 대한 파장보다 국정원의 위상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혹시나 대터러, 대북공작활동에 오해를 일으킨 자료는 삭제했다"며 자신의 행위에 우려할 부분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자살은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 가운데 하나다. 인생의 마지막 흔적인 유서는 그래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개 유서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죽음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와 흔적이 남겨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개된 그의 유서를 몇번씩 읽어 봐도 그가 자살할 직접적인 이유를 찾을 길이 없다. 그의 말대로 내국인에 대한 사찰과 선거에 대한 사찰이 전혀 없었다면 적극적인 해명을 통해 실추된 국정원의 명예와 위상을 되찾으면 그뿐이다. 그러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이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의혹들만 양산해 내고 있는 모양새다.
그의 자살에는 몇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된다. 먼저 그가 죽기 전 자료를 삭제한 이유가 불명확하다. 국정원 직원은 혹시나 대터러, 대북 공작활동에 오해를 일으킨 자료를 삭제했다고 유서에 기록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국정원이 (그들이 늘 주장해온 대로) 정당하게 대터러, 대북 공작활동을 지원했다면 굳이 자료를 삭제할 이유가 없다. 일반에 공개되면 안되는 극비의 국가기밀이라면 국회의 합의를 거쳐 정치권에만 공개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정원이 구입한 해킹프로그램과 이를 이용한 불법사찰 논란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관련 자료를 삭제했다면 공개되면 안되는 떳떳하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삭제된 내용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지고 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까지 삭제해야만 했던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대북용의자나 대북 공작관련 인사, 대테러 대상자 등의 명단이라는 추측도 있고, 외부에 노출되면 안 되는 대테러 및 대북 공작활동 담당자의 신원이나 활동 목적 등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 국정원의 대북공작을 돕는 '연락책'의 휴대전화나 IP 기록 등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다. 북한과 중국을 수시로 왕래하는 우리측 연락책의 신원이 드러날 것을 우려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엄청난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그의 죽임에 의혹이 더욱 커지는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인 지도 모른다.
복구가 가능한 방법으로 자료를 삭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이철우 정보위원회 새누리당 간사는 브리핑을 통해 "국정원에서 디지털포렌식을 통하면 100% 복구가 가능하다고 했다"고 밝혔고, 익명의 여권 관계자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일부 정보위원들에게 아무리 늦어도 이번 달 안에 삭제된 파일이 100% 복구 될 것이라는 취지로 보고했다"며 삭제된 자료의 복구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관련 자료를 삭제하려 했다면 '디가우저'같은 복구가 안되는 방법을 택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더욱이 그는 20년 넘게 사이버 안보분야에서 일해왔던 베테랑이자 전문가였다. 아무리 극심한 공황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들 그가 복구가 가능한 방식으로 관련 자료를 삭제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의 죽임이 세상에 알려진 경위 역시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가 집을 나선 것은 오전 5시 경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남편이 평소처럼 출근하는 것으로 느꼈다"던 부인은 어찌된 영문인지 5시간이 지난 오전 10시30분쯤 경찰에 남편의 실종신고를 했다. 불과 5시간 정도 연락이 안됐을 뿐인데 경찰에 실종신고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화나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남편의 죽음을 직감한 부인의 신기한 예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부인 사이에 한시라도 연락이 안되면 안되는 어떤 개인적인 이유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 어느쪽이든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경찰 역시 "부인이 왜 갑자기 실종신고를 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며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정원은 19일 국정원 직원의 자살과 관련해 "이 직원은 유서에서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분명히 밝혔다"면서 "고인의 죽음으로 증언한 이 유서 내용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국정원은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하기 위해 매일 근거없는 의혹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다"며 현 상황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무명으로의 헌신'을 선택했던 동료 직원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국정원의 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정원은 자신들에게 제기된 의혹들이 결국 자신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국정원의 패악질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들을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정원이 그동안 대선개입, 간첩조작사건, 민간인 사찰 등을 통해 법치와 인권을 유린하며 권력을 향한 '무명으로서의 조작과 은폐'에 앞장 서 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번 사건 역시 남겨진 유서와 국정원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의혹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는 국민불신을 부추겨온 국정원 스스로가 초래한 문제이지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며, 국정원 명의의 공동성명을 통해 본질을 회피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공동성명 따위가 아니라 해킹 프로그램의 도입경위와 사용 실태, 그가 왜 자살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국민 의혹을 해소시키는 일이다.
드러난 정황만으로는 국정원 직원의 자살은 도무지 설명이 되지를 않는다. 따라서 그의 죽음을 포함한 사건 전반에 걸친 철저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국회에서는 지금 야당을 중심으로 이번 국정원의 해킹 프로그램 불법 사찰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위가 추진 중에 있다. 고인이 죽음으로 증언한 유서 내용이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지기 위해서는 국정원 스스로가 이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공개해야만 한다. 대선불법개입 사건과 간첩조작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자료를 은폐하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의혹과 불신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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