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놀랐다. 그래도 명색이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 모여있다는 대한민국 최고의 집단지성들이 아닌가. 분쟁과 다툼의 조정자이면서 정의의 최후의 보루라고 일컬어지는 법률가들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논리와 증거에 죽고 사는 전국 법원 법원장들의 생각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달라도 아주 달랐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법원행정처의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사법부가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모양이다. 의혹을 입증할만한 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법원장들의 입장은 앞서 4~5일 있었던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회의, 서울고법 판사·부장판사들의 회의 결과와 비교해 크게 차이가 없다. 당시 그들은 사법부 차원의 고발이 이뤄진다면 수사 과정에서 사법부 독립의 침해가 우려되고 일선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사실상 수사 반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일선판사들은 물론이고 법조계와 시민사회가 사법부에서 발생한 재판 거래 의혹에 분노하며 검찰 수사를 촉구하고 있는 가운데 외견상 고위 법관들이 제동을 걸고있는 모양새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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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들의 인식에서 흡사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논리 파괴의 황당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사법행정처장)이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한 건 지난달 25일이었다. 특별조사단은 양승태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정권에 재판 거래를 시도한 정황이 적혀있는 문건을 다수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시국사건이나 정권에 부담이 되는 사건들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판결(?)해 주는 방식으로 박근혜 정부와 일종의 '딜'을 했다는 내용이다.
재판 거래 의혹이 일각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은 공개된 문건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실제로 2015년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VIP 면담 이후 상고법원 입법추진 전략' 문건을 보면 '빅딜 카드'란 표현이 스스럼없이 등장한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관련 사건의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등의 재판 결과가 BH에 대한 유화적 접근 소재로 이용이 가능하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문건의 실제 실행 여부는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하겠지만 이는 양승태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정부와 모종의 재판 거래를 했다고 합리적으로 의심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재판 거래 의혹에 등장하는 사건의 면면 역시 이러한 의구심을 더욱 짙게 만든다. 통합진보당 사건부터 시작해서 전교조 법외노조화 사건, KTX 승무원 및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 철도노조 파업 등 민생·노동 관련 사건에 이르기까지 당시 박근혜 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시국 사건 상당수가 법원행정처가 만든 문건에 올라있다. 공교롭게도 해당 사건 모두 박근혜 정부에게 유리하도록 판결이 난 사건들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공개되지 않은 문건이 공개된 문건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일 것이다. 400여 건의 문건 중 100여 건의 문건만이 공개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재판 거래 관련 의혹은 드러난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
사법부를 향해 국민적 비판이 쇄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엄격하고 공평하며, 추상같은 법의 잣대를 보여주어야 할 사법부가 권력과 모종의 거래를 한 정황이 드러났으니 국민 여론이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사정이 이렇다면 사법부 스스로 사태의 심각성을 통감하고 사법 위기 극복을 위해 조직 전체가 나서야 할 것이다.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가 스스로 궤도를 이탈한 겪이니 이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 역시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명확한 진상규명과 성역없는 책임자 처벌을 통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의무가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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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위 법원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고위 법관들의 생각은 그와는 다른 모양이다. 그들은 계획이 적혀있는 문건만 있을 뿐 실행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며 수사 의뢰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살인할 계획을 세우기는 했지만 미수에 그쳤으니 죄가 없다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인식이다. 고위 법관들의 이같은 태도는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는 일선판사들·법조계·시민사회의 주장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단독 및 배석판사, 인천지법 단독판사회의, 부산지법 단독판사회의, 청주지법 전체판사회의, 부산지법 부장판사회의, 의정부지법 등 일선판사들은 검찰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법조계의 비판 역시 비등해지고 있는가 하면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고소·고발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11일에는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소속 115명의 대표판사들이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철저한 조사와 책임추궁을 요구했다. 대표판사들은 이날 경기 고양 사법연수원에서 전국법관대표회를 열고 "사법행정권 남용사태에 대해 형사 절차를 포함하는 성역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추궁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판사들은 "우리는 사법행정권 남용사태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께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며 "이번 사태로 주권자인 국민의 공정한 재판에 대한 신뢰 및 법관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훼손된 점을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밝혔다.
대표판사들은 이날 김명수 대법원장 등 사법부 명의로 재판 거래 의혹을 검찰에 고발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과 사법행정처가 자행한 사법행정권 남용사태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깊이 공유하고 형사 절차를 통해서 진상이 철저하게 규명돼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철저한 조사와 성역없는 수사를 통한 책임자 처벌만이 추락할대로 추락한 사법부의 위상과 신뢰를 되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것일 터다.
사태 수습의 키를 쥐고 있는 김 대법원장은 지금까지 나왔던 법관들의 회의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대법관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최종 결정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판결해야 할 사법부가, 정부 권력에 맞서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야 할 사명과 책무가 있는 사법부가 이번 의혹으로 인해 벼랑 끝에 섰다는 사실이다. 김 대법원장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세간의 이목이 '김명수'의 입을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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