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가 또 다시 구설에 올랐다. 지난달 30일 그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 중 변을 당한 젊은 노동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모두 세개의 트윗을 작성했다. 그런데 이 중 두번째 트윗이 논란을 일으켰다. 트윗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두번째 트윗을 삭제했고 얼마 뒤 다른 내용의 세번째 트윗을 올렸다. 그는 왜 이전 트윗을 삭제하고 새로운 내용으로 다시 올려야만 했을까.
(좌) 논란이 되자 삭제한 안철수 대표의 트윗 'cheolsoo0919', (우) 연합뉴스 ⓒ insight
대중을
공분케 만든 두번째 트윗을 먼저 살펴보자. 그가 무슨
생각으로 '여유'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두번째 트윗에 등장하는 '여유'는 다음과 같은 단어로 바꾸어도 문맥이 전혀 어색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재력', '능력', '시간', '노력' 같은 어휘들 말이다. 단어를 바꾸어도 텍스트의 본질적인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안철수 대표가 이 젊은
청년의 죽음을 사회구조적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다.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라는 표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하면,
이 표현 하나로 스크린도어 사망사건 속에 함의되어 있는 비정규직 문제, 열악한 노동환경,
비합리적인 갑을관계 등의 사회구조적 병폐들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데에 있다. 가뜩이나 주류언론이
이번 사건을 개인과실과 안전불감증으로 물타기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부적절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트윗 내용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부득불 위험천만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한 노동자의 죽음에 있다. 따라서 그를 사지로 몰아넣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성찰과 이를 통해 시스템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그러나 안철수 대표의 인식 속에는 '여유'는 고사하고 최악의 환경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해야만 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그 결과 사건의 본질을 단순 파편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 huffingtonpost
논란이
됐던 두번째 트윗을 삭제한 뒤 올린 세번째 트윗은 사실 두번째보다 더 끔찍하다. 세번째 트윗 속에는 안철수 대표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제적 표현이 등장한다. 이 트윗의 핵심은 첫 문장의 '누군가'와
'우리'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는
거침없이 말한다. 앞으로도 '누군가'는 '우리'를 위해 위험한 일을 해야 한다고.
여기서 그가 말하는 '누군가'는
'여유'가 없어 위험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의미가 명확한 '누군가'와 달리 '우리'라는 대명사는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애매모호하다. '우리'라는 범주 속에 '나'의 위치가 어디 쯤인지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 알쏭달쏭한 '우리'라는 표현 역시 대체 가능한
다른 어휘들로 치환해보면 그가 올린 트윗의 진의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세번째
트윗의 첫 번째 문장에 등장하는 '우리'는 (이미 안철수 대표가 '누군가'를 '여유'가 없는 사람들로 규정해 버렸기 때문에) '국회의원', '재벌', '지역 유지', '기득권' 등 권력을 가졌거나 적어도 그에 근접하는 우월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나 세력을 지칭한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고인이 된 청년과 같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태반인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라면 그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물론 혹자는 이것을 지나친 비약이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 안철수
대표의 트윗 내용을 선의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의 인식의 저변에 계몽주의와 엘리트주의가 짙게 깔려있다는 사실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비판을 의식해 트윗을 삭제하고 다시 올린 글에서조차 이 정도라면 평소 그가 자신과 다수 시민을 어떻게 계급화시키고 있는지는 쉽게 예상해
볼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 오마이뉴스
안철수
대표는 트윗 논란이 거세지자 31일
"부모님의 마음을 표현했던 건데, 진의가 잘 못 전달될 수 있겠다 싶어서
(트위터 글을) 수정했다"고 해명했다.
아찔하게도 그는 자신이 다시 올린 트윗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가늠조차 못하고 있다.
그는 스크린도어
사망사건의 본질은 놓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날린 트윗의 진의를 바로잡기 위해서 부단히도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작 바로 잡아야 할 것은 트윗 내용이 아니라 절대다수 노동자들이 마주한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라는 것을 그는 도무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유력한 대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안철수 대표의 이번 트윗 논란이
최악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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