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7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주장했다고 일본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복수의
일본 언론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라오스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소녀상 문제도 포함해 합의의 착실한
실시를 향한 노력을 부탁한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베 총리의 발언은 작년
12·28일 위안부 문제 합의 당시 박근혜 정부가 소녀상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명문화한 내용에 따른 것이다.
지난달 말 일본 정부가 위안부 지원재단 출연금 10억 엔을 송금하는 것으로 한일 합의에 따른 일본 측 이행 부분을 마무리했으니
한국 정부도 소녀상 문제 해결에 전향적으로 나서달라는 의미다.
논란이 일자 외교부는
8일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 정부의 입장은 일관되고 명확하다"면서 "양국 외교장관이 합의 당시 발표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공식입장을 내놓았다. 소녀상을 사이에 두고 한일 정부가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 오마이뉴스
12·28 합의 이후 소녀상 철거 문제가 양국 사이의 첨예한 외교전으로
비화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민간단체가 건립한 소녀상이 정부 차원에서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는 우리
정부의 입장과는 달리 일본 정부는 소녀상 철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12·28 합의 이후 일본 정부는 소녀상 철거가 합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고 거듭 주장해 온 터였다. 12·28 합의 직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기자회견을 통해 "소녀상은 이전될 것으로 인식한다"고 밝힌 이후, 일본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녀상 철거 문제를 거론하며 우리 정부를 압박해 왔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지난
4월 26일 박 대통령이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소녀상 철거는 정말 합의에서 전혀 언급도 안 된 문제"라고 언급하자, 바로 다음날 정례 브리핑을 통해 박 대통령의 발언을 반박했을 정도로 소녀상
철거 문제에 집착해 왔다. 이는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12·28 합의 이행의 주요 쟁점으로 삼고 있다는 방증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합의문에 소녀상 철거 문제를 명문화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소녀상 철거 문제와 관련해
일각에서 제기되는 한일 양국의 이면 합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여러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빌미를 우리 정부가
제공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본 정부가 소녀상 철거를 줄기차게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2·28
합의의 이행 조건이었던 10억 엔의 출연금을 이미 지불한 상태이기 때문에 소녀상 철거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올 터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 정부는 지금처럼 소극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궁색한
처지다. 더구나 정부가 일본의 출연금 10억 엔을 사실상의 배상금이라
규정했기 때문에 앞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법적 책임을 요구하기도 힘들어졌다.
12·28 합의를 두고 이해할 수 없는 굴욕적 합의라는 비판이 폭주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한일 양국의 뒤바뀐 처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당당하고 거침없이 소녀상
철거를 외치고 있는 반면 피해자인 우리 정부는 되레 소극적으로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오마이뉴스
이런 와중에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이 위안부 할머니들 앞에서 마치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발언을 해 빈축을 사고 있다. 8일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일본 정부가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사과하고 빌었다. 얼마 전에 재단에 돈을 보내왔고 할머니들께
나눠 드릴 것이다. 마음 편하게 계시라"고 말한 것이다.
(12·28 합의에도 불구하고) 아베 내각은 기본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 책임은 물론이고 위안부 동원에 대한 강제성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국민들이 합의 무효와 재협상을 거세게 요구하고 있는 것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하며 출연금 수령을 거부하고 있는 것도 그에 기인한다. 일본 정부의 참회와 사과, 법적 책임이 없는 위안부 문제 합의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소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법적·도덕적 책임 인정과 사과, 그리고 배상에 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가부 장관이 일본 정부를 거들고 나선다. 이 순간 느끼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12·28 합의가 굴욕적이라면 여가부 장관의 행태는 그보다 더 수치스럽다.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과 인권 문제가 다시 한번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대한민국 여성의 권익보호에 앞장서야 할 주무부처의 장관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은 12·28 합의 직후 가진 비공개 간담회에서 "일본이 잃은
것은 10억 엔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위안부 할머니들이 거부하고 있는 10억 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한·미·일의
외교 전략적 협력체제 강화?
법적·도의적 책임없이 소녀상 이전을 대놓고 요구하고 있는 일본 정부와 그런 일본 정부에 속절없이
끌려다니는 정부, 여기에 일본 정부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있는 여가부 장관까지. 이런 구도라면 양국의 손익계산은 너무나 명확해 보인다.
12·28 합의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이 정부를 용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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