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일) 새누리당은 그야말로 초상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최고위원들 사이에 한바탕 격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거취를 두고 최고위원들 간의 반말과 고성이 이어졌고 급기야 욕설까지 등장했다. 수많은 기자들이 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고위원들 사이의 갈등은 진풍경에 가까웠다. 언론은 이날의 진풍경을 여과없이 기사화했고, 최악의 막장극을 연출한 새누리당은 하루 종일 검색어 순위 1~2위를 오르내리는 달갑지 않은 유명세에 시달려야만 했다.
막장극의 포문은 최근 '유승민 저격수'로 떠오르고 있는 김태호 최고위원에 의해 시작됐다. 회의 내내 그의 눈은 매의 눈처럼 이글거렸고, 그의 목소리는 전투에 임하는 장수처럼 거칠었다. 발언 순서가 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콩가루 집안이 잘되는 것 못 봤다"면서 "유 원내대표 스스로가 콩가루 집안이 아닌 찹쌀가루가 되겠다고 한 만큼 이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말해 회의장을 일순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김태호 최고위원의 도발적 발언에 회의실 안은 일촉즉발의 전운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내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해 버렸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든든한 지원군인 원유철 정책위의장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불만을 토로하자, 김태호 최고위원은 마이크를 다시 잡으며 반론을 제기하려 했고 이에 화가 치민 김무성 대표가 회의 종료를 선언하며 자리를 떠나 버렸다. 김태호 의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회의장을 떠나는 김무성 대표를 향해 "무슨 이런 회의가 다 있어"라며 격앙된 감정을 그대로 토로했고, 이를 보다 못한 김학용 대표 비서실장은 김태호 최고위원을 향해 "저 개XX"라는 원색적인 욕설을 날리기도 했다. 이날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의 최고의결집행기관으로서 당무를 통할·조정하는 최고위원회의의 역할은 물론이고 그 어디에서도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서의 품격과 예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김태호 최고위원이었다. 그는 현재 새누리당 내에서 가장 강력하게 유승민 원내대표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인물이다. 친박과의 연관성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친박보다 더 친박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의외다.
그는 친박의 맏형 격인 올드보이 서청원 최고위원과 떨어진 끈을 어떻게든 이어보려는 이인제 최고위원과는 입장이 확연히 다르다. 오히려 유승민 원내대표의 퇴진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왔던 사람은 저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분노 표출 이후 그의 태도는 이전보다 훨씬 강경해졌다. 김무성 대표의 거듭되는 자제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점점 더 강하게 공세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제 최고위원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청원, 이정현, 이인제 최고위원은 말을 아끼고 있는데 유독 김태호 최고위원만 작심한 듯 격한 감정을 토해 냈다. 박근혜 대통령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는 그의 변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김태호 최고위원은 지난해 7월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 출마할 당시 "집권여당이 청와대의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이 당을 통해 이뤄지게 하겠다"며 "청와대가 우리 당의 출장소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당의 역할을 반듯하게 재정립해 만사당통을 이루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한 바 있다. 그는 당 중심의 국정운영을 힘주어 강조했을 만큼 수평적 당·청관계의 정립을 당면 과제로 생각하던 인물이었다. 이랬던 그가 최고위원이 된 이후 조금씩 색깔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김무성 대표의 상하이 개헌 파동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태호 최고위원은 김무성 대표의 상하이 개헌 발언으로 논란이 일었을 때 "(김무성 대표가) 대통령에게 염장을 질렀다. 가슴이 많이 아프실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을 편들어 주는 발언을 했다. 울고 싶은 사람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때리며 김무성 대표를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가 추진하려던 경제관련 법안이 제 때 처리되지 못하자 "국회가 밥만 축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며 느닷없이 최고위원직 사퇴를 선언해 당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했다. 이는 모두 박근혜 대통령의 앓던 이를 빼주는 장면들이다.
청와대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더니 불과 1년 사이에 청와대의 심기를 살피는 입장으로 뒤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김태호 최고위원은 왜 박근혜 대통령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전령사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변신은 정치공학적 측면으로 보자면 대권을 향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대권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내에 뚜렷한 계파나 조직이 없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의 힘과 친박의 조직력이야말로 대권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도 퇴임 이후를 생각해 본다면 확실한 친박 대권주자를 물색해 두어야만 한다. 현재 친박 내에 대권후보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점도 김태호 최고위원의 상품성을 높여주는 이유 중의 하나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친박보다 더 친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김태호 최고위원의 최근 행보가 박근혜 대통령 및 친박과의 교감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가 당 안팍의 거센 비난을 무릎쓰고 '유승민 찍어내기'에 목을 매야 할 이유가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김태호 최고위원은 변신을 선택했다. 정치인의 변신은 일종의 승부수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의 승부수는 '만사당통'을 이루어 수평적 당·청 관계에 수립하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뒤집은 가운데 이루어졌다. 정치인의 생명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신뢰에 달려있다.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지난 몇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똑똑히 말해주고 있다. 국민에게 했던 약속을 뒤로 한 채 막나가고 있는 김태호 최고위원의 변신은, 그래서 무죄가 아닌 유죄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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