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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28일 '장자연 성추행 사건'을 목격했던 한 사람이 JTBC ‘뉴스룸’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9년 만에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했다.
앞서 그해 2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장자연 사건 재수사를 촉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해당 청원은 한 달여 만에 20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은 이후 검찰 과거사 조사위원회(조사위)의 재수사 방침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된다. 사건 이후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던 그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뜨거운 응원과 격려에도 두려움을 온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당시 인터뷰는 익명으로 진행됐고 목소리 역시 변조된 채 방송을 탔다. 인터뷰 도중 그는 당시의 고통과 아픔이 떠오른 듯 한동안 말문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인터뷰 주인공은 사건 당시 고 장자연씨와 같은 소속사에 있던 신인배우 윤지오씨였다. '뉴스룸'과의 인터뷰로 화제가 됐던 윤씨가 다시 방송 인터뷰를 가졌다. 몇 개월 전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 문을 두드리던 윤씨는 그 사이 조금 더 강해지고 단단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얼굴과 이름을 직접 밝히고 나선 것.
3월 5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윤씨는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피해자가 숨어 사는 세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는 고통과 죄의식 속에 숨어지내는 데 반해 가해자가 외려 떳떳하게 살아가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는 것이다.
윤씨는 "가해자들이 너무 떳떳하게 사는 걸 보면서 좀 억울하다는 심정이 많이 들었던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사건 이후 윤씨는 가족이 살고 있는 캐나다로 돌아가 10년 가까이 세상과 유리된 채 살아가고 있다. 어찌보면 가장 아름답고 풋풋해야 할 인생의 황금기를 악몽과도 같은 끔찍한 기억 속에 갖혀 지냈던 셈이다.
반면 가해자들은 윤씨의 말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살고 있는 모양새다. 장씨가 남긴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거론된 언론사 사주와 방송국 PD, 기업인 등 유력인사 20여 명에 대한 수사는 '혐의 없음'으로 종결됐다. 폭행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소속사 대표와 매니저에게만 각각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을 뿐이다.
당시 수사는 '부실 수사', '봐주기 수사'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윤씨 역시 이날 인터뷰에서 "당시 사건 조사는 21세였던 제가 느끼기에도 굉장히 부실한 수사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실제 검찰 과거사진상조사단이 지난해 10월 28일 발표한 중간조사 결과를 보면 당시 경찰 수사가 얼마나 엉성하게 진행됐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장씨가 사망한지 1주일 만인 2009년 3월 14일 장씨 거주지와 차량 등을 압수수색했지만 불과 57분만에 종료한 것으로 확인됐다.
옷방, 핸드백 등은 아예 수색조차 하지 않았으며 확보한 수사자료 또한 수사기록에 첨부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단은 "장자연 문건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기본 자료인 장씨 휴대폰 통화내역, 휴대폰 포렌식 결과, 컴퓨터의 디지털 포렌식 결과 등이 수사기록에 첨부되어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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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스러운 정황은 이뿐만이 아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25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장씨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검사가 제출한 통화내역이 편집본인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박 의원은 “장씨의 1년치 통화내역이 수사기록에서 사라졌다가 당시 수사 검사가 따로 보관하던 기록을 다시 제출했다”며 “경찰과 검찰이 뭔가 은폐하려 했던 게 아닌가 의심된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처럼 사건 당시 논란이 된 검경의 부실 수사 의혹은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장씨가 남긴 성접대 리스트에 국내 최대 보수언론사 사주를 비롯해 재계, 금융계, 방송계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적혀있었지만 당시 검경은 '수박 겉핧기'식 수사를 폈고 결국 '무혐의' 처분으로 황급히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장자연 사건이 다시 소환된 이유일 터다.
한편 윤씨는 이날 새로운 의혹을 제기해 김어준 공장장과 청취자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윤씨는 장씨의 문건이 "기획사에서 나오기 위해서 작성된 문건이 아니었을까"라며 "세상에 공개하기 위해 쓰여진 문건이 아니라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쓰여진 문건"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강압적인 술접대와 성접대를 견디지 못한 장씨가 기획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문건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윤씨는 문건의 존재를 장씨 기획사의 대표와 장씨가 옮기려던 기획사의 대표가 모두 알고 있었다는 점, 장씨가 문건 작성시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 문건을 다른 사람이 공개했다는 점, 장씨 유서에 문건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면 혼자 보려고 작성한 게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그때 당시에 소속되어 있던 기획사를 벗어나서 새로운 기획사로 가려고 했고, 그게 안 풀어 주니까 그렇다면 기획사에게 당신들이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킨 게 아니냐 라고 정리한 문건을 만들었고, 그 문건의 존재는 이미 소속되어 있던 기획사도, 그리고 가려고 했던 기획사도 알고 있었고, 중간에 누군가도 알고 있었고, 그 문건을 보강하기 위해서 본인한테 물어본 사람도 있었고. 유서가 아니네요, 문건이. 저는 유서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서가 전혀 아니네요"
윤씨의 의혹 제기에 김어준 공장장은 대단히 의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 윤씨의 증언대로라면 꽤나 충격적이다. 이 사건은 술접대와 성접대, 폭력 등 기획사의 강압을 견디지 못한 여배우의 자살 사건으로 알려져온 터였다. 그러나 윤씨가 제기한 의혹은 그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성접대, 부실 수사, 수사 외압 의혹 등에 맞춰져있는 조사위의 수사 범위에 추가돼야 할 부분이 생겼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윤씨는 이 이야기는 처음 밝히는 내용이라고 했다. 장씨가 문건을 만든 이유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으니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일 테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을지 모를 "문건을 왜 작성한 것인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수사기관은, 그리고 이 사회는 묻지 않았던 것이다.
우울증에 의한 단순 자살로 처리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 장씨의 유서와 성상납 문건 공개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그러나 사건을 담당했던 검경은 늑장 수사, 부실 수사로 일관했다. 문건에 이름이 올라있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수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사건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흐지부지 처리됐다.
장씨의 후배이자 동료였던 윤씨의 인생 역시 일순간에 달라졌다. 윤씨는 성추행 사실을 증언한 이후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극심한 심적 고통과 압박 속에서 살아야 했다고 술회했다. 꽃다운 나이에 찾아온 악몽이 누군가의 소중한 목숨과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것이다.
"가해자가 움츠러들고 본인의 죄에 대한 죄의식 속에 살아야 되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책임감과 죄의식을 가지고 사는 그런 현실이 한탄스러웠기 때문에 이제는 조금은 바뀌어졌으면 하는 그런 소망을 가져서 용기를 내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습니다"
윤씨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절규이자 일침이다. 그 용기와 결단에 답해야 할 차례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억울함을 넘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거악(巨惡)과 맞닿아 있다. 권력층의 치부와 민낯을 누가 어떻게 덮었는지, 자신을 옭아매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장씨가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장씨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적어도, 이 사회가 때린 놈이 두 다리 뻗고 자는 곳이 되어서는 안 돼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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