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 노역을 하루 하는데 일당을 무려 5억이나 쳐준 통큰 재판 결과가 화제가 되고 있다. 광주고법 제1형사부는 2010년 1월 21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원이 선고된 전 대주그룹 허재호 회장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을 선고했고, 벌금을 납부하지 않을 경우 1일 5억원 씩 계산해 노역장에 유치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대로라면 구금된 날을 제외한 49일 동안의 노역장 유치로 허 전 회장은 벌금 254억원을 면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이처럼 화끈하고 파격적인 판결을 일찌기 본 적이 없다. 하루에 자그만치 5억원의 가치가 있는 노역이란 과연 어떤 노역을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상상이 안된다. 노역장에서 람보르기니라도 만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재판부의 이번 판결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아가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권력을 가진 사회 기득권 층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가중시키는 '참으로 나쁜' 판결에 해당된다는 것 역시 자명하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라는 사법정의와 원칙을 무시하고 사회공동체에게 위화감만을 조성시키는 이와 같은 판결은 결국 사법부의 권위와 명예에 스스로 침을 뱉는 웃지 못할 촌극에 다름 아니다. 사법부의 어이없는 이번 판결을 보면서 필자의 머리 속에 불현듯 아주 오래된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1983년에 발매된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는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대한민국에 대한 찬사와 희망찬 미래를 향한 꿈을 담고 있는 이 노래는 당시 TV와 라디오에서 주구장창 틀어주던 국민가요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너나 할 것 없이 흥겹게 따라부르던 이 노래 속엔 놀랍게도 '저 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라는 가사가 포함되어 있다.
세상에나. '정권 홍보용 관제가요'라는 오명이 늘 따라 다니는 이 노래의 정치적 비하인드 스토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대한민국 음반 역사 상 가장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인 가사를 바로 이 곳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꿈과 현실은 서로 마주보는 대극에 놓여 있다. 이 기만적인 노래가사는 우리에게 현실의 낭만을 달콤하게 속삭이고 있지만 현실은 우리의 낭만적 꿈을 철저하리만큼 가혹하고 냉정하게 짓밟고 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을 미화하고 찬양하기 위해 번번히 차용되어 온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전태일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입버릇처럼 '국민행복'을 거론하며 '국민소득 4만불' 시대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장미빛 청사진 역시 "죄송하다"는 허망한 유언을 남기며 세상을 등진 세 모녀의 비극적인 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국가와 정치권력이 국민에게 제시하는 꿈과 이상은 국민계몽과 통치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자 도구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단히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낭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에드워드의 가위손이 깊고 깊은 얼음산 위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아름답게 눈꽃을 날려주는 모습은 우리사회의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어떤 사람들은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은 고사하고 행복을 누릴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텨내는 처절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하루 노역의 댓가로 무려 5억원의 벌금을 감면해 주는 일이 천연덕스럽게 일어나는 곳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다.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우리는 대다수 서민과 사회적 약자를 우롱하는 이 정신나간 판결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직시해야만 한다. 이번 판결은 국가가, 정치권력이, 사법부 등의 국가기관이 더 이상 서민과 사회적 약자의 보호막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준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같은 오래된 관성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시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와 특권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보다 분명하게 이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분출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시민권력이 강화되어 왔고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해 왔는지를 기억해 낼 필요가 있다. 그것만이 이 모질고 지리한 싸움을 이길 수 있는 승리 방정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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