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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파면 이후, 박근혜의 침묵이 석연찮은 이유

ⓒ 오마이뉴스


숨막히는 21분이었습니다. 10일 열렸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는 극적인 반전이 있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했습니다.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탄핵소추 사유 중 공무원 임명권 남용, 언론의 자유 침해, 생명권 보호 의무와 직책 성실수행 의무 등이 소추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낭독할 때까지만 해도 탄핵 기각의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추사유 중 하나였던 '사인의 국정개입 허용과 대통령 권한 남용' 부분에 이르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헌재는 이 부분을 대단히 심각한 헌법·법률 위반 행위로 판단했습니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이 김종 전 문체부 2차관 등 최순실씨가 추천한 인사를 공직에 임명하고, 이들이 최씨의 사적 이권 취득을 위해 조력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최씨의 이익을 위해 박 전 대통령이 지위와 권한을 남용해 공정한 직무수행 의무를 위반했고, 기업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을 요구함으로써 기업 경영의 자유 또한 침해했다고 밝혔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최씨에게 대통령의 일정과 외교, 인사 등의 직무상 비밀 문건을 유출한 것 역시 국가공무원법 제60조 비밀엄수 의무를 위배한 것이라고 못박았습니다. 결국 최순실씨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했던 것이 박 전 대통령이 판면된 결정적 이유가 됐습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헌재가 "피청구인의 헌법과 법률 위반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로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라고 강조한 부분입니다. 대통령은 대의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법치주의를 확립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이 부분을 방기했을 뿐만 아니라 헌법과 법률을 위반함으로써 헌법수호의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헌재가 주문에 앞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명시한 것만 봐도 이는 명확합니다.

대통령은 취임에 앞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하는 대통령 선서를 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 앞에 선서했던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와 책임을 심각하게 위배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대의민주주의제도와 법치주의에 대한 몰이해와 왜곡, 박약한 헌법수호 의지가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인용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게 만든 것입니다. 

헌재가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결정함으로써 이제 박 전 대통령은 자연인의 신분으로 돌아갑니다. 그에 따라 형사상 불소추 특권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 대부분이 박탈되었습니다. 대통령 연금, 비서관 및 운전기사 지원, 본인 및 가족 치료 지원, 교통·통신 및 사무실 제공,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 지원 등을 받을 수 없게 되며, 국립현충원 안장 역시 불가능해졌습니다. 불과 하루 사이에 박 전 대통령의 처지가 180도 달라진 것입니다.


ⓒ 오마이뉴스


그런데 헌재의 파면 결정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행태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당초 탄핵이 인용되면 10일 오후 경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날 것이란 예측이 많았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자연인의 신분이 된 이상 청와대에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여전히 청와대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 청와대의 관계자는 삼성동 사저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 머무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사저 정비 문제로 청와대에서 당장은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파면된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의 소지가 많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검찰의 조사를 앞 둔 피의자 신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청와대에는 현재 검찰 수사와 관련해 수많은 증거자료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자신과 관련된 혐의 일체를 부인해왔던 점으로 미루어 박 전 대통령이 증거 인멸과 은폐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대통령기록물의 훼손 가능성도 있습니다. 국민의당 장진영 대변인은 "박 전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보여온 수사방해 행태를 볼 때 대통령기록물과 청와대 비서실의 기록물을 훼손하거나 은닉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그 누구라도 국정농단 관련 증거 은폐 또는 훼손을 시도한다면 엄벌에 처해져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헌재가 결정문에 명시했듯이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이 범죄 사실을 철저히 은폐해왔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가 청와대를 즉시 떠나야 할 이유는 너무도 명확합니다.

박 전 대통령이 헌재의 결정에 아직까지 아무런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 것도 논란입니다. 헌법과 법률을 심각하게 위배하고 국정을 마비시킨 책임이 명백해졌는데도 불구하고 박 전 대통령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 청와대는 헌재 결정이 기각이나 각하될 경우를 대비해 통합과 화합을 강조한 박 전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인용 판결이 나자 그에 대한 입장 표명이 전혀 없습니다.

문제는 박 전 대통령의 침묵이 헌재의 결정에 대한 '불복'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박 전 대통령의 대리인단은 헌재의 탄핵 인용이 "명백한 헌법 위반"이라며 판결에 강한 불만을 내비쳤습니다. 탄핵 선고 이전부터 박 전 대통령의 대리인단은 헌재의 결정에 불복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대중을 선동해 왔습니다. 친박 단체들 역시 섬뜩한 구호를 동원해가며 불복 운동에 나서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혀 온 상태입니다. 탄핵 선고 이후의 사회적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탄핵이 인용되자 우려가 현실이 되는 모양새입니다. 탄핵 선고 당일 탄핵 반대 집회에서는 취재진과 일반 시민에 대한 무차별 폭행이 벌어졌고, 2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흥분한 탄핵 반대 시위대들을 막던 경찰관 33명이 부상당하기도 했습니다. 세간의 우려대로 탄핵 인용의 후폭풍이 거세게 몰아닥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박 전 대통령이 헌재의 판결을 대해 승복 입장을 밝힘으로써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최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정작 묵묵부답입니다. 사저가 정비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청와대를 떠나지 않고 있는가 하면, 헌재 판결에 대해선 입장조차 밝히지 않았습니다. 무책임하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대의민주주의를 훼손시키고 헌법가치를 파괴한 박 전 대통령은 '파면'이라는 국민적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헌재에 제출했던 최후변론서에서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든 갈라진 국민들의 마음을 모아 지금의 혼란을 조속히 극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최후변론서에 밝혔던 내용 그대로 즉시 이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국정을 파탄시킨 장본인으로서 국가와 국민에게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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