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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측근 비리 대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달랐다

ⓒ 오마이뉴스


2003 10 10,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해외순방을 마치고 막 귀국한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그는 이날 예정에 없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물론이고 보좌진까지도 그 내용을 몰랐던, 그야말로 깜짝 기자회견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기자회견의 내용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자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는 폭탄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기자들은 탄성을 터트렸고, 참모들의 표정은 얼어붙었다. 충격을 받은 것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TV를 통해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국민들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대통령에 취임한지 채 1년이 안 된 시점이었다.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고 결과 여하에 따라선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 있다는 사실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나는 커다란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능한 한 사람의 대통령보다 그 사회에서 대통령이 책임질 줄 알고 또 제대로 일할 수 있게 환경을 함께 협력해서 조성해갈 수 있는 정치 문화의 환경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 한 사람이 중간에 희생하더라도 한국의 정치가 바로 갈 수 있으면 그것은 임기 5년 다 채우는 것보다 더 큰 진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정국은 2002년의 대선자금 수사로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여야 모두 검찰의 표적이 된 상태였다. 당시 한나라당은 대선자금 차떼기로 국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노 전 대통령 역시 측근이 이 문제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이었던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 때문에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으로부터 융단폭격을 받고 있던 터였다.

노 전 대통령의 재신임 기자회견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한 노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정치적 승부수'라 평가하며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당시 지지율이 바닥을 치던 노 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들은 청와대를 향해 재신임의 방향과 시기를 분명하게 밝히라고 몰아치는가 하면 국정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여론전을 펴는 등 대통령 재신임을 기정사실화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정치적 승부수'를 떠나 원칙과 공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의 소신과 신념에서 비롯된 결단이었다. 그는 책임을 누구보다 무겁게 여기고 있는 정치인이었다. 재신임 기자회견 역시 측근 비리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원칙과 책임의 산물이었다. 그는 비리와 부패에 연루된 인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풍토야말로 민주주의의 발전과 정치개혁을 위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가치를 위해서라면 대통령직도 과감히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정치인이었다.



ⓒ 오마이뉴스


불현듯 과거를 복기하는 것은 현실 정치가 그만큼 무책임하고 불의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숱한 의혹이 제기된 우병우 민정수석을 끝까지 감싸고 도는 박 대통령의 모습에서 측근 비리 의혹에 대통령직까지 걸었던 노 전 대통령의 원칙과 소신이 그리워진 까닭이다. 


박 대통령은 우 수석에 대한 의혹을 정권 흔들기 차원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 주말 청와대에서 쏟아져 나온 격앙된 반응들은 그가 이번 논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대변해 준다. 청와대는 우 수석의 사퇴를 요구하는 언론과 여론의 행태를 부패 기득권 세력과 좌파 세력의 '식물정부 만들기' '우병우 죽이기'로 단정지었다. 언론에서 제기된 수많은 의혹들과 감찰 과정에서 드러난 민정라인의 조직적 감찰 방해 행위조차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는 박 대통령이 '우병우 흔들기'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 대통령의 맹목적인 측근 감싸기는 친인척 측근 비리를 차단하기 위해 박 대통령 스스로가 도입했던 특별감찰관의 감찰 결과조차 부정하게 만들고 있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감찰 내용 유출을 문제삼고 있는 청와대가 정작 우 수석에 대한 감찰 내용은 문제삼지 않고 있다는 점은 코미디나 다름 없다. 본말이 전도된 박 대통령의 끔찍한 자기부정은 '우병우 지키기'의 궁극적인 목적을 가늠케 한다. '우병우'는 곧 박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절대권위이자 권력의 상징이다.

박 대통령의 권위와 권력에 대한 집착과 방어기제는 노 전 대통령의 그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기실 우병우 사태로 야당과 언론, 여론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고 있는 박 대통령의 상황과 2003년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처했던 상황은 별반 차이가 없다. 노 전 대통령 역시 측근 비리 문제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맹폭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측근 비리를 헤쳐나가는 방식에서 두 사람은 판이하게 다른 길을 선택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최 비서관이 지난 20년 동안 저를 보좌해 왔습니다. 검찰 수사 결과가 밝혀지면 대통령인 제가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며 국민들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과 달리, 박 대통령은 사과는 고사하고 우병우의 ''자도 꺼내지 않은 채 문제의 원인을 특정 언론과 좌파 세력에게 전가해 버렸다. 한 사람은 측근 비리 의혹에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들에게 사죄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오히려 국민들을 향해 자신의 권위에 흠집을 내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측근 비리에 대처하는 두 대통령의 자세가 이렇게나 확연히 다르다. 법치가 훼손되고 원칙과 공정이 무력화되고 있는 시대, 측근 비리를 대하는 두 대통령의 상반된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해 주고 있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있는 무엇이 박 대통령에게는 없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위기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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