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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조국 때문에 분노한다는 고3 엄마, 35세 주부, 대학생들에게

ⓒ 중앙일보

 

"고3 엄마도 35세 주부도, 너무 분해 난생처음 집회 나왔다"

4일자 <중앙일보> 기사 제목입니다. <중앙일보>는 전날 열린 광화문집회 관련 내용을 보도하면서 이날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의 반응을 소개했습니다.

서울 봉천동에 사는 주부 유모(55)씨, 세 살과 다섯 살 된 딸들과 함께 현장을 찾은 주부 김모(35)씨가 기사 제목에 등장하는 "너무 분해 난생 처음 집회 나왔다"는 사람들입니다.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서울 중계동에 사는 주부 최모(57)씨, 네 살과 여섯 살 된 아들을 둔 주부 박모(37)씨도 기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하모씨, 공모씨, 유모씨, 곽모씨, 강모씨 등 누가 등장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기사에는 "서초동집회를 다 합쳐도 5만 명이 안 될 것 같았는데 200만 명이라고 거짓말하는 걸 보고 집회 참가를 결심했다"는 고등학교 교사 김모(34)씨의 인터뷰도 실려있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그는 어느 학교에서 어떤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일까요. 

<조선일보>도 이날 "광화문·대학로 몰려나온 청년들 '이게 정의로운 나라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서울대 학생 70여 명이 '문 정권 심판! 조국 구속!' '폴리페서 물러나라'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는 내용입니다.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의 논조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 이 기사가 작성된 경위와 의도를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기자라면 이런 식의 기사는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고 싶네요. 근거와 팩트가 결여된 '하더라'식의 기사, 대표성이 없는 일부의 의견을 전부인 것처럼 호도하는 기사는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으니까요.

인터뷰 기사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국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을 뿐더러 분노의 대상과 방향 역시 엉뚱한 곳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자녀로 인해 유명세를 탄 입학사정관제도(입사관제)는 이명박 정부 시절 도입됐습니다. 간단히 말해 수능과 내신 위주가 아니라, 창의력과 잠재력, 가능성을 보고 학생들을 뽑자는 취지였습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비교과 과목 활동을 입시에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스펙쌓기' 경쟁이 과열되면서 소위 금수저 자녀가 혜택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제도의 취지는 학생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발굴하기 위함이었지만, 결국 부유층 자녀들의 스펙 입시를 위한 도구로 변질돼 버린 것입니다.

조 장관의 자녀가 바로 이 시기에 입사관제를 통해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논문 제1저자 기재, 영어캠프 및 봉사활동 이력 등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는 그 당시 이명박 정부가 적극 추천한 제도이자 관행이었습니다. 

 

ⓒ 동아일보


그런 면에서 조 장관 딸이 받고 있는 입시 특혜 의혹은 어느 한 개인만의 문제로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입사관제의 헛점과 맹점을 입시에 활용한 특권층의 반칙과 편법이 조 장관 자녀를 계기로 드러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자유한국당 등 보수야당, 대다수 언론은 오직 조 장관 일가에게만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조 장관을 성토하는 고3 엄마와 35세 주부, 대학생 등도 그와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조 장관 일가가 논란이 되고 있는 특권층의 부정과 비리의 전부인 것처럼 분노하고, 싸잡아 비난합니다.

물론 그들의 실망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기회의 균등과 공정을 강조해온 조 장관의 언행불일치는 비판받아 마땅하니까요. 그리고 이유야 어찌됐든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여서는 곤란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입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사회 구조와 시스템입니다. 법을 정비하고 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혁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권층 중 과연 누가 '반칙과 특권, 특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입니다.

이는 한국당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을 제외하면 건국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사회를 이끌어온 주류는 보수정권이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입사관제를 도입한 것도 그들입니다. 한국당의 투톱인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역시 자녀의 특혜 의혹에 휘말려있는 상황입니다.

황당한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간 특혜와 기득권을 마음껏 향유해온 그들이 마치 심판자라도 된다는 듯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의기롭게 단식을 하고 삭발을 합니다. 세상 모든 반칙과 특권을 마치 조 장관 일가만이 누려온 것처럼 인민재판하듯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조 장관이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를 두둔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고3 엄마가, 35살 주부가, 대학생이 진짜 분노해야 할 것은 어쩌면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반칙과 특권을 비판하면서 지난 수 십년 동안 기득권과 특혜를 누려온 정당이 주도하는 집회에 참석해  "너무 분해 나왔다"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율배반이자 모순 아닌가요. 일제의 만행과 수탈에 분노한다면서 아베 내각의 평화헌법 개정에 찬성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저들의 분노가, 그 아우성이 씁쓸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점이 잡히지 않은 총구처럼, 분노해야 할 이유가,분노해야 할 방향이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천절은 '홍익인간'의 정신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당신은 무엇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그 분노는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기를 권합니다. 합리적 분노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지만, 잘못된 분노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