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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제왕적 대통령제? 제왕적 국회는 어쩌굽쇼!

6월 개헌이 결국 불발됐다. 여야가 국민투표법 개정안 처리에 실패하면서다. 주지하다시피 현행 국민투표법은 지난 2014년 7월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법 개정 없이는 6월 개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국가 주요 정책에 대해서도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국민투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국가의 중대 사항에 대해 국민의 의사를 물어 결정하는 국민투표 제도는 간접민주제의 단점과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됐다. 국회는 이처럼 막중한 현안을 지금껏 4년 가까이 방치해 왔다. 국회의 직무유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야는 국민투표법 개정 데드라인이었던 23일에도 '드루킹' 사건 특별검사 도입을 둘러싸고 파행을 거듭했다. 온라인 댓글조작 행각을 벌이다 적발된 이번 사건이 민심을 심각하게 왜곡한 범죄 행위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터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시대적 과제이자 국민의 요구인 개헌보다 시급한 의제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 오마이뉴스


이번이 31년 만에 찾아온 개헌의 적기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동안 개헌 실패의 주된 요인 중 하나로 꼽혀온 것이 바로 대통령의 의지 부족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가 개헌에 미온적인 모습을 보이자 자신이 직접 개헌안을 발의했을 정도로 개헌에 적극적이었다. 임기초 개헌이라는 점도 개헌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게 만들었다. 역대 정권의 경우 국정 장악력이 약해지는 임기말에 주로 개헌을 추진했던 탓에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 개헌 의지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중앙일보가 지난 2017년 9월 창간 52주년을 맞아 국회의원 298명에 대해 전수조사(241명 응답)한 결과에 따르면, '개헌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사대상 241명 중 227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헌 찬성이 무려 94.2%에 이를 만큼 압도적인 수치다. 

개헌시기에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6월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하는 것을 꼭 지켜야 한다'는 질문에 '매우 찬성'이 49.4%, '어느 정도 찬성'이 39.4%인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7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90%에 가까운 국회의원들이 '지방선거-개헌 국민투표'에 찬성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더욱 흥미로운 것은 6월 개헌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반응이다. 전수조사에 응한 의원들 중 자유한국당의 경우 무려 80.4%가 6월 개헌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당(94.6%)·바른정당(94.4%)·정의당(100%)은 그보다 더 높았다. 그러나 불과 몇개월 뒤 정의당을 제외한 한국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 등 야3당은 6월 개헌 반대 입장으로 선회한다.

야3당의 태도 변화는 지방선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개헌 이슈가 여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실제 지방분권, 기본권 향상, 토지공개념, 경제민주화 등의 개혁적 기치가 담겨있는 헌법개정에 국민의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뜨거운 만큼 정부여당에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투표가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지방선거가 개헌 이슈에 묻힐 경우 정권심판론이 힘을 받기 어렵다는 점도 고민이다. 야당이 돌연 6월 개헌 반대로 돌아선 이유일 터다. 

신보라 한국당 원내대변인은 국민투표법 개정안 처리가 무산된 23일 논평을 통해 "어설프기 그지없는 한 달 짜리 졸속 개헌안을 국회에 던져놓고 통과시키라며 생떼를 쓰는 청와대나 앞에서만 개헌을 외치고 뒤로는 개헌 무산 책임을 야당에게 씌워 지방선거에 활용할 궁리만 하고 있는 민주당이나 개헌에 대한 진정성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비난했다. 6월 개헌이 무위로 돌아간 책임이 청와대와 민주당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야당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대통령 개헌안이 발의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야당은 개헌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을까. 개헌의 당위를 역설하며 호기롭게 출범한 개헌특위는 2017년 1년 동안 허송세월로 일관하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문을 닫았다. 2018년 시작한 헌정특위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4개월 간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을 뿐 특위는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개헌 입장을 명확히 밝히라며 문재인 후보를 맹폭했던 야당은 하나 같이 6월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랬던 그들이 정권 창출에 실패하자 태도를 바꿔 6월 개헌 반대를 부르짖고 있다. 당의 입장이 당리당략에 따라 극과 극으로 요동친다. 공당이라면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당하다. 언제는 6월 개헌을 해야 한다고 난리더니, 이제는 하면 안 된다고 난리다. 심지어 그들은 공약 파기에 대한 사과조차 없다. 


ⓒ 오마이뉴스


여야의 첨예한 이슈인 권력구조 개편 역시 생각해 볼 일이다. 야당은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된 권력의 오·남용과 폐쇄적 국정 운영에 따른 부작용이 심각한 만큼 이를 반드시 손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야당은 그 대안으로 책임총리제를 기반으로 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있다. 국회가 임명한 총리가 내치를 담당하고, 대통령은 통일·외교·국방 등 외치에 전념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야당의 이같은 주장에 황당하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국회에 대한 국민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국회는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도 조사가 있을 때마다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태다. 심지어 국회는 '정치검찰'이란 오명을 받고 있는 검찰보다도 신뢰도가 낮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 권한과 위상이 강화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할지 의문이다. 이는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여론이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회를 향한 국민 불신을 고려하면 야당의 주장은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나 다름이 없다.

한편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거론하고 있는 국회의원의 과도한 특권과 특혜, 권한 등도 따져볼 일이다. 2014년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누리는 특권·특혜는 무려 200가지에 달한다.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을 위시한 국회의원의 각종 특권·특혜는 논란의 온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런가 하면 국회의원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서도 멀찌감치 비켜나 있다. 처리해야 할 민생·개혁법안이 산적해 있지만 4월 임시국회는 개점휴업 상태다. 그럼에도 국회의원 월급은 에누리 없이 정확하게 통장에 꽂힌다. 

국회의원은 탄핵도 안 당한다. 법률을 위반한 대통령은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를 당할 수 있지만 국회의원은 그마저도 없다. 어디 이뿐인가. 대통령은 연임할 수 없지만 국회의원은 제약조차 없다. 능력만 있다면 무한 연임도 가능하다. 국회의원의 막강한 '파워'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야당이 비협조로 나오자 당장 국정이 마비된다. 추경예산안, 방송법 개정, 민생 법안 등 각종 현안들이 줄줄이 국회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지는 흔하디 흔한 일상이다. 

"국회는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모아 발의한 헌법개정안을 단 한번도 심의조차 하지 않은 채 국민투표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로써 이번 지방선거 때 개헌을 하겠다고 국민께 다짐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 국민들께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깝다는 말씀을 드린다."

문 대통령은 24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6월 개헌이 무산된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6월 개헌은 여야 정치권 모두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송구하다는 대통령과 그런 대통령을 향해 비난을 쏟아붓고 있는 야당. 나는 저들 중 누가 더 '제왕적'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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