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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의당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어야 했다.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지난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깜짝 놀랄만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창당 직후에 벌어진 인재영입 논란, 한상진 창준위원장의 이승만 국부 발언 논란, 시당 창당대회 파행, 비례대표 공천 논란 등 각종 구설에 휩싸일 때만 하더라도 국민의당이 원내교섭단체를 달성할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국민의당은 호남지역 의석을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했고, 정당득표율에서는 더불어민주당(더민주)에 앞선 2위를 기록했다. 그 결과 지역구 의석 25석에 비례대표 의석 13석을 더해 총 38석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 국민의당이 이렇게 선전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필자를 포함해) 거의 없었다.

국민의당이 선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적으로 호남지역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국민의당은 호남지역의 더민주 심판 정서를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결국 이 전략이 큰 위력을 발휘하면서 호남 전체 의석 28석 중 23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특히 민주화의 성지이며 호남 민심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광주 의석 8곳을 모두 가져가며 호남의 맹주로 떠올랐다.



ⓒ 노컷뉴스



국민의당은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명실상부한 원내 3당이다. 거대 양당의 기득권 구조를 허물어 새로운 정치체계와 질서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안철수 상임공동대표의 포부는 이번 총선으로 말미암아 탄력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더민주와 새누리당 사이에서 양당을 견제하는 '캐스팅보트' 역할이 가능해 졌기 때문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20대 총선은 국민의당이 원했던 구도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구도가 과연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 그리고 노동자 서민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 의문은 정치정당으로서 국민의당이 갖고 있는 태생적, 그리고 본질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의문은 국민의당이 창당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리고 안철수라는 정치 공학도가 정치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시점부터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의문이기도 하다.

정치정당은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대리해주는 통로이자 도구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은 자신들의 정치 철학과 이념, 비전 등을 국민에게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민의당은 뚜렷하고 선명하게 자신들의 철학과 노선을 밝힌 적이 없다. 낡고 닳아빠진 구태 정치의 대체제로서 그들의 정체가 도무지 불분명한 것이다.

오히려 정치 철학이나 이념, 당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자면 자신들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던 새누리당이나 더민주와 별반 차이가 없다. 당의 정체성은 보수에 가깝고, 새로운 인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기득권에 빠져 있는 양당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들 대부분이 오래 전부터 호남에 뿌리내리고 있는 기득권이다.

당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천정배, 정동영, 김한길, 박지원, 주승용, 박준영 등은 모두 호남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이다. 새누리와 더민주의 패권정치를 비난하기엔 그들 자신부터가 패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저들은 혁신과 개혁의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다. 심지어 박준영 당선자는 20대 국회가 개원하기도 전에 공천헌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아무리 뜯어봐도 국민의당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새정치, 정치 개혁, 기득권 타파, 패권주의 청산, 부정부패 척결 등을 위한 진심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말과 행동이 따로 놀고 있는 모습. 이는 그들이 그토록 비난해왔던 기성정치의 구태스러움 그 자체다. 기계적인 양비론과 대중의 정치 불신과 혐오만으로도 충분히 자생력이 있음을 국민의당은 보여주고 있다



ⓒ 오마이뉴스


원내교섭단체를 목표로 했던 정의당은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두자리수 의석 달성에도 실패했다. 심상정 대표와 노회찬 전 의원을 원내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밖의 지역에서는 아무도 살아오지 못했다. 정의당이 받아든 최종 성적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합쳐 6석에 불과하다. 그 결과 국민의당에게 원내 3당의 지위를 내주고야 말았다.

정의당이 받아든 결과는 여러모로 실망스럽다. 정의당은 총선 과정에서 어떠한 공천갈등도 패권주의적 행태도 드러내지 않았던 유일한 원내 정당이었다. 불협화음없이 오로지 정책과 인물 중심으로 총선 전략을 세웠고, 20대 총선을 앞두고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이 평가한 주요 정당의 분야별 공약 검증 결과에서는 가장 우수한 성적표를 받기도 했다.

경실련의 평가에서 정의당은 청년, 주거, 노동, 정치개혁, 사법(국정원) 개혁, 통일·외교 분야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이는 1위가 하나도 없었던 국민의당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정의당의 공약들 중 청년, 주거, 노동 공약들은 모두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민생과 관련된 정책들이다. 경실련의 평가는 정의당이 다른 어떤 정당보다 뚜렷한 민생 정책과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정의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 총선에서 6석을 얻는데 그치고 말았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지역주의에 기댄 양당정치의 폐해 속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진보정치의 현실이 이번에도 정의당의 발목을 잡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심상정과 노회찬 이후를 생각해야 하는 정의당으로서는 당의 존립을 위해 이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다시 국민의당으로 돌아가 보자. 원내 3당을 차지한 국민의당은 당분간 '캐스팅보트'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입장이다. 정국 주도권을 놓지 않으면서 수도권과 영남지역을 공략하겠다는 복안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그들의 애매모호한 포지셔닝이다. 국민의당의 정체성은 누가 더 보수적이냐의 논쟁이 있을 뿐 새누리당과 더민주와 비교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정치의 보수성이 더욱 짙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어디까지나 공급과잉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구도 속에서라면 인권, 환경과 생태, 노동, 여성 등의 진보적 의제들이 빛을 잃거나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아울러 청년, 주거, 보육, 복지 등 실질적인 민생 대책 역시 실효를 거두기 어렵게 된다. 국민의당이 총선 전 이미 원샷법 처리에 합의했고, 총선 이후에는 노동악법인 노동3법을 수용하기로 하는 등 친기업 반노동적 행태마저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 SBS 뉴스 화면 갈무리


'캐스팅보트'의 사전적 의미는 두 정당의 세력이 비슷할 때 그 승패를 결정하는 제3당의 결정권을 말한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정치구도 속에서 '캐스팅보트'의 역할이란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나아가 이것이 민생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노동자 서민을 위해서 이보다 더한 불행이 또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대 총선의 '캐스팅보트'는 보수일변도인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진보적 색채의 정당,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의 의지가 확실한 정당, 정치 개혁과 혁신을 선도할 수 있는 투명하고 선명한 정당이 가져갔어야만 했다. 이 장면은 두고두고 아쉽다. 노동자 서민의 삶을 볼모로 잡는 노동3법에 동의한 보수우파 정당의 의기양양함을 보니 더더욱 그렇다. 우리 정치는 여전히 제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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