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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장준하 40주기, 유골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지난 2013년 1월24일 사법부의 판결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과거의 잘못된 사법판단이 39년 만에 바로 잡히는 역사적인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이날 재판부는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974년 기소되어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의 확정 판결을 받은 고 장준하 선생의 재심판결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와 함께 유신군사독재시절 자행된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유족과 국민 앞에 사죄를 했다. 정치권력에 의해 유린당한 한 사람의 인권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39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유신헌법은 박정희가 국회 해산과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는 '10·17 비상조치'로 계엄령을 선포한 뒤 비상국무회의에서 심의해 1972년 11월21일 국민투표를 거쳐 12월27일 공포되었다. 일본 메이지 유신에서 착안한 유신헌법은 모든 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키는 것을 골자로 만들어졌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시켰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할 수 있도록 했으며,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뿐만 아니라 국회 해산권 및 모든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했고,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없애 영구 집권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처럼 유신헌법은 삼권분립과 국민주권, 헌법과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으며 민주주의 종언을 선언한 박정희를 위해 설계된 '박정희 법'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입법, 사법, 행정의 3권분립을 부정하고 대통령 한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에 있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선거를 통한 대의제도는 물론이고 삼권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의 대원칙도 일거에 무너졌다. 대신 대통령을 정치권력의 최고 정점으로 하는 무소불위의 권위주의적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크게 훼손되었고, 박정희 체제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비난도 할 수 없는 철권통치체제가 구축되었다. 유신헌법 아래에서 국가폭력은 정당화되었고, 이로 인해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일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 유신헌법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온 몸으로 저항했던 장준하 선생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유신헌법 철폐를 부르짖던 장준하 선생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1974년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고 이듬해인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근처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밝힌 사인은 실족사였다. 당시 그의 죽음은 여러가지 의문점들을 남겼다. 그러나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후 유족들과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경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진상규명불능'이라는 판정을 받고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겨진 채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미스터리로 남을 뻔한 그의 죽음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2년이었다. 그 해  9월1일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폭우로 무너져 내린 장준하 선생의 묘역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두개골의 함몰 골절을 집중조명하는 '유골은 무엇을 말하는가' 편을 방송했다. 방송은 ▶추락사한 사체로 보기에는 그 상태가 너무 깨끗한 점 ▶유골에 정원형의 둔기로 맞은 듯한 구멍과 금이 나 있는 점 ▶절벽에서 추락시 부러져야만 하는 목뼈와 어깨뼈가 멀쩡한 점 ▶추락할 때 나타나는 생존반응이 전혀 없다는 점 등 사체를 둘러싼 의문점을 관련 전문가의 소견과 함께 내보냈다. 방송이 나가자 각종 포털사이트와 SNS를 중심으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둘러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그리고 이 여론은 유골에 대한 정밀 감식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2013년 3월26일에 장준하 선생의 유골 정밀 감식 결과가 발표되었다. 결과는 모두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부검·감식했던 법의학전문가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는 "추락사라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며 "머리 부분에 가격을 당해 숨진 뒤 추락해 엉덩이 뼈가 골절되었고, (함몰 골절과 관련해) 망치보다는 아령이나 돌과 같은 물체로 가격 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밝혀 타살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정빈 교수의 소견은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전문가 견해와 정확히 일치한다. 갑작스럽게 내린 폭우로 4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유골이 미궁에 빠져있던 장준하 사망 사건을 급반전 시키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의 유골은 세상에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오늘 이 자리는 권위주의 통치 시대에 큰 시련과 옥고를 겪은 고인에게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사죄를 구하고, 잘못된 재판 절차로 고인에게 덧씌워진 인격적 불명예를 뒤늦게나마 복원시키는 매우 엄숙한 자리이다. 국가 주권과 헌법 정신이 유린당한 인권의 암흑기에 시대의 등불이 되고자 스스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고인의 숭고한 정신에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장준하 선생에 대해 무죄를 판결한 재판부의 판결문 중 일부다. 이날 사법부는 뒤늦게나마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를 했다. 박정희 유신독재시절 정치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이 바로 잡히고 그에 대한 사죄를 받아내기까지 무려 40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과 그 유족들이 받아온 시련과 고통을 생각한다면 재판부의 무죄 판결과 사죄는 만지지탄에 불과할 뿐이다. 





어제는 장준하 선생의 40주기였다. 그러나 타살이 명확하다는 결론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으로서 평생을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했던 장준하 선생과 그의 유족들이 받아야 할 천형이라면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왜곡된 진실과 일그러진 역사가 바로 서게 될까. 장준하 사건 등 진실규명과 정의실현을 위한 과거사청산 특별법은 새누리당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 현재 국회에서 1년 9개월째 계류 중이다. 장준하 선생 40주기,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장준하 선생과 그 유족들이 사법부의 무죄 판결과 사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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