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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우리는 법 앞에, 국민 앞에 당당한 사법부를 원한다

ⓒ 오마이뉴스


"이제야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측의 승소 판결을 내리자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가 밝힌 소회다. 강제징용 피해자 유가족이기도 한 이 대표는 이번 판결이 "그동안 땅에 떨어진 사법부의 위상을 되살리는 길이자 일제 강점기 시절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실어주는 것"이라며 기뻐했다. 

자그마치 21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재판에서 승소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1997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었던 여윤택·신천수씨 등이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시작된 이 재판은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싸움이면서 동시에 시간과의 사투이기도 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들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갔다. 일본에서의 소송도 지난 2003년 패소가 확정됐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2005년 피해자들은 서울중앙지법에 같은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항소심 결과는 일본 법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2012년 열린 상고심에서 대법원 1부(당시 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원심 판결을 뒤집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강제징용은 불법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는 정당하다는 논리였다. 파기환송심 역시 대법원 취지와 같았다. 법원은 신일철주금이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신일철주금의 재상고로 2013년 8월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이 넘도록 심리는 열리지 않았다. 대법원 심리가 늦어진 이유가 최근에서야 밝혀졌다. 한·일관계 악화를 우려한 박근혜 정부의 의중에 맞춰 당시 양승태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재판일정을 조정하고 거래를 해온 정황이 드러났다. 그 사이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줄 것인가. 

박근혜 정부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으로 피해를 본 이들은 강제징용 피해자가 전부가 아니다. 양승태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깨고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을 파기환송한 이후 5명의 노동자가 가족 곁을 떠났다. KTX 승무원 사건은 또 어떤가. 양승태 대법원이 1심과 2심 판결을 뒤집고 KTX 승무원들의 복직을 가로막자 이에 좌절한 해고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콜텍 정리해고 사건, 철도노조 파업 판결 등도 마찬가지다. 항소심에서 노동자들이 승소했지만 모두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양승태 대법원이 자행한 사법농단의 피해 사례들이 이처럼 부지기수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부와 재판거래를 시도했다고 의심받는 양승태 대법원이 사법정의를 망각하는 사이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 아들과 딸이었을 이들이 세상을 등졌다. 과연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 오마이뉴스


29일 열린 국제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정치권 안팎에서 뜨겁게 분출되고 있는 특별재판부 도입 문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안 처장은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별재판부 논의는 일단 공감할 점이 있다"며 "그렇지만 전례 없는 일이고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에 대한 여러 의견도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면밀하게 검토돼야 한다는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이런 말도 했다. "특별재판부라는 선례가 만들어지면 특별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설치 논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법부가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면이 있다"고. 말의 행간에서 안 처장이 심중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선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특별재판부 설치는 곤란하다는 거다.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이 양파껍질처럼 벗겨져 나오고 있다. 사법부가 정치권력과 결탁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해야 할 사법부가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사법부 독립, 삼권분립 원칙을 스스로 차버린 결과는 끔찍하고 참담하다. 사법불신 풍조가 극에 달한 가운데 양승태 사법농단 의혹 사건의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사법부가 먼저 특단의 조치와 방안들을 제시해야 마땅할 터다. 

그러나 현실은 영 딴판이다.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을 계기로 사법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범사회적으로 힘을 받고 있는 상황임에도 사법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외려 공고한 특권의식과 조직보호 논리만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방탄법원'이라는 세간의 조롱과 비아냥은 허투로 나온 것이 아니다. 사법부 내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조직 방어기제는 강고하고 뿌리가 깊다. "전례가 없다", "선례를 남긴다"는 이유로 특별재판부 도입에 난색을 표시한 안 처장의 인식이 이를 방증한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이 남긴 상처가 생각보다 깊다. 정권과 공모해 재판거래를 시도한 사법부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실체 규명을 막아서려는 조력자들이 조직내에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무엇보다 재판거래로 인해 누군가의 목숨이 희생되고, 누군가의 삶이 송두리째 망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법농단 의혹의 피의자 혹은 잠재적 피의자가 될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재판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별재판부 도입 요구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는 이유일 터다. 해오던 관행대로 사법부에 사법농단 사건을 맡길 경우 '재판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다. 사법부 스스로 초래한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라도, 땅바닥에 쳐박힌 권위와 위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특별재판부 도입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명제다. 

침묵한다고 해서, 외면한다고 해서, 부정한다고 해서 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재판의 공정성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사회 일반의 상식이다. 길은 하나다. 사법부 스스로 달라지는 수밖에는 없다. 처참하게 무너진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법 앞에, 그리고 국민 앞에 당당한 사법부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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