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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비례민주당? 선거개혁의 당위는 어디로 사라졌나!

ⓒ 중앙일보

 

기류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지난해 연말 '4+1협의체' 주도로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안 등 패스트트랙을 처리할 때까지만 해도 더불어민주당의 분위기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4·15 총선 표심의 가늠자가 될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여전히 40% 중·후반대를 기록하고 있었고, 민주당 역시 40% 안팎의 안정적인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요.

20대 총선 당시 국민의당 돌풍에 휘말려 전멸하다시피 했던 호남지역에서도 의석수를 되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이 지역은 문 대통령과 민주당 지지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전체 의석 28석 중 적어도 20곳 이상은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죠.

'정부 심판론'보다 '야당 심판론'이 높다는 점도 민주당의 어깨를 한결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한국갤럽이 지난 1월 7~9일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0일 발표한 결과(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에 따르면, '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이 49%, '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 응답이 37%로 나타났습니다.

당 안팎에서는 과반 달성이 가능하다는 예측까지 나왔습니다. 지난 1월 2일 저녁 JTBC 신년특집 대토론회에 출연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금 상황에서 큰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게 가능하다"며 "나아가 우호적인 정당을 포함해 국회선진화법상 입법을 할 수 있는 180석을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사이에 국면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곳곳에서 위기의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는 것이죠. 일각에서는 과반은커녕 원내 1당도 위험하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갤럽이 지난 11일~13일 전국 성인10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4일 발표한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에 따르면, '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비율(45%)이 '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43%)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상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민심이 변한 것입니다. '정부를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이 '야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을 앞질렀습니다. 총선 승리를 발판으로 집권 후반기 흔들림 없는 국정운영을 이어가려던 민주당의 전략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죠.

총선 결과는 차기 대선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민주당이 느끼는 위기감은 배가 됩니다. 만에 하나 원내 1당을 미래통합당에게 넘겨줄 경우 야당의 대정부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최악의 경우 탄핵 국면까지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민주당 일각에서 '비례민주당'을 창당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통합당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에 맞서려면 민주당 역시 비례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미래한국당을 통해 상당수의 비례의석을 확보할 것으로 보이는 통합당이 원내 1당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민주당 일각에서 비례정당 창당 요구가 나오고 있는 것은 그에 따른 고육책으로 보입니다.

당 지도부는 일단 선을 긋고 있지만 민주당 지지층과 일부 의원들을 중심으로 창당 요구가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에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주목할 것은 최근 민주당 안팎에서 비례정당 창당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송영길 의원은 25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판단해서 미래한국당의 선거법 악용 반칙 행위를 폐쇄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저런 반칙 행위를 그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비등할 수밖에 없다"며 "반칙 행위를 뻔히 보고도 당해야 하는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위성정당 창당에 부정적이던 이인영 원내대표도 23일 기자들과 만나 "기본 입장에 변함이 없다"면서도 "여러 의병들이 만드는 것을 내가 말릴 수는 없지 않느냐"라며 과거와는 결이 다른 발언을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윤건영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은 21일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선거에서는 민심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는 걱정이 있고 그런 비상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판단해야 한다"고 했고, 민주당 홍보위원장을 지낸 무소속 손혜원 의원은 20일 유튜브 방송을 통해 "민주당 위성 정당이 아닌, 민주 시민을 위한 시민이 뽑는 비례 정당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며 비례정당 창당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꿈꾸는 자'를 참칭하는 자들이 판치는 정치판을 한 번쯤은 바꾸는 게 맞을 것 같다. 국민들에게 희망이란 것을 주는 것이 정치라는 것을 한 번쯤은 보여드려야 하지 않을까")과 민병두 의원("현재 거론되는 방안은 범보수 연합에 원내 제1당을 뺏길 수 없다는 민병대들이 비례정당을 만드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도 비슷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지도부는 일관되게 부인하고 있지만 이처럼 민주당 안팎에서는 비례정당을 창당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모양새입니다. 예상과 달리 미래한국당이 연착륙에 성공하자 현실론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비례정당 창당하려는 민주당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민주당은 자유한국당(현 통합당)이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창당하자 '페이퍼 정당', '유령 정당', '쓰레기 정당'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개정된 선거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한 편법이자 선거체계와 정당 정치의 근간을 허무는 꼼수라는 비판이었습니다.

만약 민주당이 비례정당을 창당하거나 이를 용인한다면 누워서 침을 뱉는 꼴이 됩니다. 위성정당을 창당한 통합당을 향해 내뱉었던 날선 말들이 민주당에게도 그대로 되돌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비례정당 창당은 진통 끝에 국회를 통과한 선거제도 개혁의 근본 취지를 민주당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선거법 개정은 민의를 왜곡해온 기존 선거제도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입니다. 원안과는 다르게 통과된 아쉬움은 있지만, 비례대표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국회에 반영시킬 수 있는 전기가 마렸되었다는 점에서 선거제도 개혁의 물꼬를 열었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비례정당은 이와 같은 선거법 개정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국회에 반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는 것은 물론 거대양당의 극단적인 진영 논리와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그간의 노력들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민주당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꼼수와 반칙에 손놓고 당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더욱이 이번 총선은 문재인 정부 후반기 국정운영과 차기대선을 위해서라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례정당 창당과 관련해 당 안팎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잇따르는 배경일 겁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위기에 빠진 까닭이 비례정당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당이 고전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자만했고, 오만했기 때문입니다. 기실 민주당의 지지율은 문 대통령의 인기에 편승한 측면이 크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민주당의 현주소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뼈 아픈 지적인 셈이죠.

실제 총선이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인적 쇄신도, 공천 감동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되레 인재영입 2호였던 원종건 씨의 미투 파문, 임미리 교수 칼럼 고발 논란, 서울 강서갑의 '조국 대리전' 잡음 등 악재가 잇따라 터져나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당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슈를 선점하기보다 야당의 공세에 끌려다니기에 급급한 모습입니다.

이런 가운데 당 일각에서는 비례정당 창당 움직임이 조금씩 힘을 싣는 모양새입니다. 총선 위기감이 현실로 나타나자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비례정당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죠.

비례정당 창당에 적극적인 손혜원 의원은 23일 페이스북에 존경하는 선배에게 받았다는 메시지를 소개했습니다. "소나무당인가 하는 비례당 빨리 만드세요. 정치에 무슨 도덕성을 개입시킨다는 건지. 무슨 공자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정치하고 패싸움에서는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하는 겁니다"라는 내용입니다.

민주당이 실제 비례정당을 창당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부와는 상관없이, 반칙에는 '반칙'으로 맞서야 한다는 민주당 일각의 주장은 여러모로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남들이 사기를 치기 때문에 나도 사기를 쳐야 한다는 논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비례민주당' 논란이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주당은 집권당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함께 시대적 과제인 선거법을 개정한 이유와 목적을 되새겨야 합니다. 국민을 설득할 명분과 힘은 바로 그곳으로부터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