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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미완의 촛불혁명, 87년의 실패를 기억하라

ⓒ KBS 뉴스 화면 갈무리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들의 대선 후보들이 모두 확정됐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국민의당 안철수, 바른정당 유승민, 정의당 심상정(원내의석 순) 후보에 무소속 김종인 후보까지 가세하는 다자 구도다. 지난 3월12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면서 이번 대선은 5월9일 치뤄지게 된다. 대선일까지는 이제 불과 한달여가 남아있을 뿐이다. 이래나저래나 설익은 밥이 될 수밖에 없는 대선이다. 


진작에 가동됐어야 할 선거대책위윈회를 제대로 출범시킨 정당은 현재 정의당과 바른정당 뿐이다. 대선 후보를 가정 먼저 확정한 정의당을 제외하면 나머지 정당들은 그동안 경선을 치르기에 분주했다. 냉정하게 말해 각 정당들이 정책공약 개발을 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는 뜻이다. 이에 후보들이 내세운 공약과 정책들을 알지 못하는 유권자가 부지기수다. 수개월에 걸쳐 진행돼야 할 작업을 고작 한두달 만에 끝내려니 벌어지는 일일 터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구체성과 현실성이 떨어지고 진지한 고민과 체계적 논리가 결여된 공약과 정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정책 검증을 할 시간이 없다보니 이전 것들을 재탕하거나 수정해서 내놓은 공약들도 상당하다. 그나마 이마저도 유권자들은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열리게 된 조기 대선이 만들어낸 웃지 못할 촌극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번 대선은 역대 최악의 '깜깜이 선거'라는 평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주지한 것처럼 미래 가치와 시대 정신을 담아낼 담론들을 걸러내고 가다듬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탄핵은 이처럼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성을 우리 사회에 던져주었다.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다. 대통령이 파면된 후 60일 이내에 치뤄지는 대선에서 정상적인 대선 과정을 기대하기는 애시당초 난망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이번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우려스럽다. 조기대선이 초래한 시간적·물리적 제약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심각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번 대선은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사회를 맹렬히 강타했던 '촛불혁명'의 에너지가 일정 부분 소진된 상황 속에서 치뤄진다. '이명박근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왜곡된 대선 프레임 속에 갖혀버릴 위험성이 높다는 의미다.

지난 17대 대선 직후의 일이다. 당시 대선후보들의 정책 검증에 소홀했던 보수신문들은 뒤늦게 이명박 당선자의 중요 대선 공약들에 문제를 제기했다. 대선 공약들의 실현 가능성을 비판하는 논지의 기사들을 쏟아낸 것이다. 18대 대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수언론들은 선거가 끝난지 불과 하루 만에 박근혜 당선자의 선거공약이 수정·철회돼야 한다고 입을 맞췄다.

이는 다분히 새정부의 국정운영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당시 보수언론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앞뒤가 뒤바뀐 기회주의적 행태에 지나지 않았다. 공약과 정책 검증은 대선 후가 아닌 그 이전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보수언론들은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 검증보다 정치권이 제기하는 각종 의혹을 부각·증폭시키기에 급급했다. 후보자 검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판이 조장한 네거티브 이슈를 전달하는데에 집중했던 것이다.

언론은 후보자들이 내세운 각종 공약과 정책의 타당성과 현실성 등을 면밀하게 살펴 유권자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 역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가 무엇인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점검해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선거가 바로 '대선'이기 때문이다. 번개불에 콩을 구워먹어야 할 판인 이번 대선에서 언론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이유다.

더욱이 이번에 선출되는 대통령은 선거 다음날 곧바로 취임해야 한다. 새정부의 정책기조와 방향을 설계해야 할 인수위원회조차 없다. 대선 과정에서 야기될 사회적 갈등을 치유할 여력도, 내각 구성과 정부조직개편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정부가 출범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구도와 관행으로 미루어 이 과정에서 국정 혼란과 갈등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따라서 대선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후보자들에 대한 엄격하고 냉철한 검증은 필수불가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 이르러 불안감이 극대화된다. 우려가 점점 현실이 돼가는 탓이다. 이번 대선에서 외교·경제·안보·사회 등 제반 현안들에 대한 후보자들 입장은 전혀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노동·인권·여성·청년 문제 같은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이슈 역시 마찬가지다. 정책과 담론이 사라진 자리는 후보자에 대한 아니면 말고 식의 각종 의혹으로 채워진다. 당장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대선 이슈의 대부분은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 공약과 정책에 대한 검증이 아닌 비방과 폭로에 맞춰져 있다.


선거판이 혼탁·과열되면서 네거티브가 판을 치고 있다. 정치판이 주도하고 언론은 그에 맞춰 춤을 춘다. 익숙하고 낯익은 이 풍경 앞에 늘어가는 건 한숨과 지독한 염증이다. 그 난리를 겪고도 우리 사회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지난 겨울의 뜨거움은 도대체 무엇을 위함이었나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87년 여름의 강렬함 뒤에 남겨진 건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주체할 수 없는 '허탈감'이었다. 그 지독한 '상실감'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란다.


시대 변혁과 정치 개혁을 정치권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촛불의 당위를 기억해내야 할 때다. 이 사회를 변혁시키라는 촛불의 명령은 아직 미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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