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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문건 유출 경위가 그렇게 궁금해? 한국당은 그것 때문에 망했다

"시민단체의 문건 입수 경로가 저도 궁금하다. 시민단체가 어떻게 그런 중요한 정부 문건을 입수했는지 밝혀지면 좋겠다."

국군 기무사령부가 계엄령을 준비했다는 군인권센터의 폭로에 대해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기자간담회에서 내뱉은 발언이다. 말의 행간에서 김 위원장이 문건이 작성된 경위와 배후보다 시민단체가 문건을 입수한 경위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기무사의 계엄 검토 문건 파문에 큰 충격에 빠진 시민들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인식이다. 

물론, 김 위원장의 발언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달 30일 기무사 계엄 검토 문건에 대해 "내란 음모로 보기에는 과도한 해석", "질 낮은 위기관리 매뉴얼"이라 밝히는 등 속내를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기무사 계엄 검토 문건은 계엄의 선포와 이후의 이행 방안들이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위기관리' 수준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 계엄 검토 문건에는 계엄 포고문, 군 병력 동원 계획, 국회 무력화 및 언론 장악 방법, 미국 정부로부터 계엄 인정을 받기 위한 외교적 조치 등이 총 망라돼 있다. 이같은 사실은 군의 계엄 준비가 소요사태를 대비하는 수준을 넘어 계엄 실행 직전까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는 헌정중단을 기획한 기무사 계엄 검토 문건을 "질 낮은 위기관리 매뉴얼"이라 평가한 데 이어, 문건의 작성 경위와 배후보다 유출 경위가 더 중요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전형적인 '본말전도'다. 침몰 위기에 빠져있는 제1야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비대위원장 직을 수락한 그가 한국당의 과거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딱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 오마이뉴스


김 위원장의 인식과 태도는 한국당의 과거와 판박이다. 왜 그럴까. 시간을 잠시 거꾸로 돌려보자. 지난 2014년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로 알려진 정윤회씨의 국정 개입 의혹이 터지자 당시 청와대와 여당은 물타기에 들어갔다. 논란의 핵심이었던 비선 측근들의 국정개입 의혹의 실체를 밝히는 대신 문건 유출을 국기문란으로 규정하며 본질 흐리기에 나선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문건 유출은)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못을 박았고, 새누리당(현 한국당)은 논란 확산을 막기 위해 당력을 집중시켰다. 비선 측근의 국정농단 의혹에서 시작된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문서 유출 사건으로 변질됐다. 결국 청와대 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박관천 전 행정관이 기소되면서 파문은 일단락되고 만다. 

'정윤회 문건'의 본질은 대통령 비선 측근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의 실체 규명에 있었다. 문건의 작성 경위와 내용, 정씨와 '문고리 3인방' 등 문건에 이름이 올라 있는 측근들의 국정개입 의혹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이 핵심이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 새누리당의 대응 방식은 그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대통령은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청와대는 문건 유출 경위를 밝히는 데 집중했으며, 새누리당은 이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위를 감찰하던 중 감찰 내용을 특정 언론사에 유출했다는 혐의를 받고 물러난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 이 사건은 우 전 수석의 비위 의혹을 밝혀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의혹은 우 전 수석의 처가와 넥센의 부동산 거래 당시 금전적 이익 제공에 우 전 수석이 관여한 것이 아니냐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아들의 병역 의혹과 가족회사인 '정강'의 횡령 의혹 등이 더해지며 우 전 수석을 둘러싼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정윤회 문건' 당시의 대응 방법을 이번에도 그대로 차용했다. 우 전 수석의 비위 의혹에 대한 실체 규명보다 이 전 감찰관의 감찰내용이 언론사에 유출된 경위를 더 추궁한 것이다. "위법행위", "국기 문란" 등의 용어가 다시 등장했고, 논점은 우 전 수석의 비위 관련 의혹에서 이 전 감찰관의 '문서 유출'쪽으로 옮겨붙었다. 박근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정윤회 문건'을 무마시켰던 방식 그대로 우 전 수석의 비위 혐의를 덮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파국의 씨앗이었다. 물타기 전략으로 '정윤회 문건'과 '우 전 수석 비위'를 가렸던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됐기 때문이다. '정윤회 문건'에 등장하는 '최순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우 전 수석은 박근혜 정권을 몰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자신들이 철통같이 지키려고 했던 바로 그것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오마이뉴스


만약 당시 박근혜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고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임했더라면 어땠을까. '정윤회 문건'이 만들어진 경위와 내용을 철저하게 규명하고, 우 전 수사의 비위 혐의와 직권남용 의혹을 원리·원칙대로 철저하게 수사했더라면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과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정반대였다. 사건의 본질은 외면한 채 비선 측근과 우 전 수석을 비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무사 계엄 검토 문건에 대한 김 위원장의 현실 인식이 지극히 우려스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내란 모의 혐의를 받고 있는 기무사 계엄 검토 문건 파문의 본질이 문서 작성의 경위와 배후를 밝히는 것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성태 원내대표를 위시해 한국당은 주권자인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헌정질서를 짓밟으려는 정치군인들의 내란 음모를 옹호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한국당의 혁신과 재건을 책임져야 할 김 위원장의 인식과 태도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한국당은 이미 '정윤회 문건'과 '우 전 수석 비위' 의혹 당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물타기로 크게 낭패를 본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문건이 유출된 경위에 매몰되는 모습이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르는 모양이다. 과거를 통해 깨닫는 게 없다면 시쳇말로 정말 답이 없다. 김 위원장은 박근혜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과거를 복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박근혜 정권은, 한국당의 표현을 빌자면 바로 그래서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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