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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것은 당신들 때문입니다

정부가 3일 2017년부터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현행 검정교과서에서 국정교과서로 바꾸는 확정고시를 단행했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어제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갖고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하는 내용의 '중·고등학교 교과용도서 국·검·인정 구분(안)'을 확정해 고시했다. 정부는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을 책임기관으로 지정해 집필진 구성과 편찬 기준 등과 관련된 내용을 4일 별도로 발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정 전환 소식이 알려지자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SNS에서는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국정교과서를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붙인 박 대통령과 정부를 성토하는 의견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애초에 권력이 역사문제에 개입하는 본질적 오류를 안고 시작했으니 각계각층의 비판과 비난이 잇따르는 것은 당연지사다. 법령 위반, 불투명한 예산집행, 여론 조작 등 법과 원칙을 벗어난 정부의 행태는 모두 국정교과서라는 구시대적 괴물을 탄생시키기 위한 처절한 몸짓이었다.


정부는 그동안 국정교과서가 필요한 이유로 학생들에게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강조해 왔다. 이를 반영하듯 황우여 교육부장관은 국정교과서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민족적 자긍심을 길러주고, 현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안목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교훈과 지혜를 주기 위해서"라고 힘주어 말했다. 결국 정부가 밀어붙인 국정교과서의 키워드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오늘 대한민국이 정말 부끄럽다. 자랑스럽기는 커녕 오히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와 관련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국에 약 2300여개의 고등학교가 있는데 그 중 세 학교만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했고, 나머지 99.9%가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나머지 교과서가 모두 편향되어 있다는 얘기다. 교학사 교과서가 총리의 입에서 다시 거론됐다. 대단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교학사 교과서 논란이야말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포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학사 교과서를 다시 꺼내든 그의 논리는 여전히 괴상하다. 교학사 교과서가 일선학교에서 채택되지 않은 이유를 그가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학사 교과서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일본군 트럭에 끌려가는 위안부의 사진을 두고 '한국의 위안부는 부대가 이용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일제의 헌병 경찰이 독립군 의병을 '토벌'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승인 획득 운동의 주역이 이승만이라는 잘못된 내용도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영토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오키노토리시마'에 대해서도 '일본의 최남단 섬'이라 표현하며 일본정부의 주장을 교과서에 그대로 실어 주었다. 이런 식으로 교학사 교과서는 수정과정을 거친 횟수만 무려 2261건에 달한다. 거의 책 한권을 다시 쓸 정도의 오류가 발견된 이 교과서를 굳이 채택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되묻고 싶다.    


교학사 교과서가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뉴라이트는 친북척결, 자학사관 반대, 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 과거사 청산 반대 등을 내세워, 과거 참여정부에서 추진된 교육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1년 8월 교육계와 역사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교과서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자유민주주의'로 바뀌었고, '이승만 독재',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가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사라져 버렸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80% 가량이던 근현대사 비중도 50% 수준으로 낮춰졌다. 그 해 10월에는 국편이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일본 국왕을 '천황'으로 바꾸라고 권고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부분에서는 김구에 대한 설명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2011년 확정된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안의 내용 중에는 제주 4.3사건을 삭제하고 정부수립 이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기술하며,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정통성과 업적을 강조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 모두 뉴라이트가 추진했던 친일 역사관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이명박 정부 시절인 지난 2010 9월 취임해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 9월까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국정교과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보수주의 역사학자로 분류되는 그는 뉴라이트가 본격적으로 교과서 개정 작업을 벌이던 이명박 정부 시절 현행 검정 교과서 내용을 심의·수정하는 검정 과정을 총괄 지휘했던 책임자다. 따라서 그의 시각은 정부와 새누리당이 현행교과서를 비판하면서 거론한 내용들의 사실성과 공정성 여부를 판단하기에 아주 유효하다.

단호하게 국정교과서 반대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그는 "현행 8종 역사 교과서는 모두 중도, 중도 우파 또는 우파 성향으로 교학사 교과서만 우파 성향으로 분류된다"고 말했다. 또한 정부와 새누리당이 현행 교과서의 좌편향을 문제 삼는 것에 대해서는 "집필 지침, 검정 결과 모두 교육부장관이 살펴보고 발표한 것"이라면서 만약 황교안 총리의 말대로 현행 역사교과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교육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정부와 새누리당의 주장은 억지춘양에 불과하며, 만에 하나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책임은 온전히 현 집권세력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김일성과 박정희의 사진 갯수를 비교해 종북교과서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김일성이 남침하려고 소련 방문한 사진, 김정일 사진 속 김일성 초상화가 어떻게 종북이냐" "학생들이 보면 자연스럽게 북한은 왕조체제처럼 운영되는 것으로 인식할 것 아닌가. 책임성을 가져야 할 정당 대표가 확인도 안 하고 대중 연설에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느냐"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황교안 총리의 담화문에 대해서도 "담화문은 봤는데 99.9%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마저 보였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초기에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보수적 역사학자의 시각이 이렇다면 정부와 새누리당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하고 이율배반적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는 문제다.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교과서 집필 지침과 내용 수정, 검정 결과 발표까지 모두 관여해 온 마당에, 이제와서 현행교과서가 좌편향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자기 얼굴에 침뱉는 겪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통령과 정부, 새누리당에게 이와 같는 문제의식이나 이성, 상식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국정교과서 전환 과정에서 드러난 자가당착과 자기모순은 이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이며 몰상식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비근한 예로 황우여 교육부장관은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고 있는 국정교과서를 두고 "대다수 국민의사를 반영하는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다. 역대급의 언어도단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는데, 대다수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교과서를 만들겠다니 이것이 말인지 발인지 알 수 없다. 이런 정신나간 소리를 이 나라의 교육부장관이 서슴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면서 보여주고 있는 행태가 거의 이런 식이다. 저들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다양성과 자율성을 침해하면서 역사관과 국가관을 권력이 강제하고 통제하겠다고 말한다. 비이성과 몰상식에 이어 반민주와 반지성, 반헌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쯤되면 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전체주의 국가, 혹은 독재국가로 정의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시민들의 개성과 인격이 존중되는 사회, 창의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개개인의 꿈들이 마음껏 구현될 수 있는 사회,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새로운 영역에 언제든 도전할 수 있는 사회, 설사 실패한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국가가 제공해 주는 사회,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평범하게 늙어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는 사회, 정의와 양심이 살아 숨쉬고 보편적 이성과 상식이 바로 서 있는 사회, 법과 원칙이 누구나 예외없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사회. 이런 나라라면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민족적 자긍심이 저절로 생겨나게 마련일 것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지난 8년 동안 이와는 정반대로 국정을 운영해 왔다. 그런데 사과와 반성은 커녕 오히려 국민들의 역사관과 국가관마저 권력이 제공하는 메뉴얼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민족적 자긍심이 높아지고,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내 이성과 실천적 경험은 자꾸 아니라고 한다. 5.16을 혁명이라 배워 왔고, 전두환을 정의사회를 구현시킨 대명사로 배워 왔던 내 가슴이 이건 잘못되었다 말하고 있단 말이다.

아닌건 아닌거다. 하늘이 두쪽이 나도 진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의 판단은 정권이, 권력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국민에게 역사관과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주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이고 가치이며 정의다. 내게 사상을 강요하지 마라. 그리고 당신들이 옳다고도 말하지 마라. 누군가에게 사상을 강요하고 스스로 옳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들은 이미 틀린 것이다. 당신들이 민주주의의 ''자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그 행위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오늘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건 교과서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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