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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통령과 국회, 누가 직무를 유기하고 있나

대통령이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노동개혁 5대 법안과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 등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경제활성화법 처리가 지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와대가 국회의 입법권 침해 논란에도 불구하고 쟁점법안에 대한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요구한 것도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새누리당 출신의 정의화 국회의장은 청와대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부했습니다. 이래저래 대통령의 체면이 많이 구겨진 셈입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대통령이 경제활성화법 처리를 촉구하면서 쏟아낸 말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국회를 불신하고 있는지 나타납니다. 최근 대통령은 국회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맨날 립서비스만 하고", "직무유기이자 국민에 대한 도전", "위선", "국회 무능", "일 안하는 국회" 등의 도전적이고 격한 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활성화법 처리가 지연되는 것을 전적으로 국회의 무능과 위선 탓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간에 대유행하고 있는 '박근혜의 말은 박근혜로 반박할 수 있다' '박적박'으로 보자면 대통령이 국회에 대해 내뱉은 말들은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이 나라에 대통령만한 '립서비스'의 달인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이며, 대통령만큼 직무유기와 위선에 도통한 대가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은 국회가 일을 안한다며 격노했지만, 14년의 국회의원 시절 동안 대표발의한 법안이 고작 15건에 불과하고 본회의 출석률과 상임위 출석률이 저조했던 대통령이야말로 일 안하는 국회의원의 대표적 인물이자 표본입니다. 대통령의 국회 비난은 한마디로 적반하장이자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습니다.



ⓒ 연합뉴스


경제활성화 법안들만 통과되면 경제와 민생이 만사형통할 것이라 말하는 것은 관련 법안의 내용은 물론 민의까지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합니다대통령은 어제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국회가)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일을 제쳐두고 무슨 정치개혁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국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을 대변하기 위해서다. 정치개혁을 먼 데서 찾지말고 국민을 위한 자리에서 찾고 국민을 위한 소신과 신념으로 찾아가길 바란다"고 일장 훈계를 늘어 놓았습니다.

대통령의 이날 발언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노동개혁 5대 법안과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에 대해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일"이라 표현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발언은 관련 법안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으며, 동시에 민의 역시 심각하게 비틀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인식처럼 국민들은 정말 정부가 추진하려는 관련 법안들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 자신인 것은 아닐까요. 

대통령이 저렇게 말하는 근거는 관련법안에 대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9 13일 노사정이 노동부문 정책방향에 합의한 이후 <중앙일보>가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의 울산지역 여론조사결과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80%가 가까운 사람들이 노동개혁에 찬성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보도가 나간 이후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는 이 조사결과를 노동개혁 추진의 근거로 자주 이용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80%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노동개혁에 찬성한다면 노동개혁법안의 처리를 지연시키고 있는 야당은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대통령의 말대로 이는 국회의 직무유기이자 민의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 중앙일보


그러나 야당을 비난하기에 앞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들이 있습니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대표가 노동개혁법안 추진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여론조사의 결과가 과연 정확한 표본과 절차에 의해 도출된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또한 국민들이 관련 법안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여론조사가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합니다. 정부정책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홍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찬성이나 반대를 유도하는 질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한국갤럽이 공개한 질문 중 하나는 "정부는 현재 임금피크제, 성과 중심 임금 체제, 재량근로탄력 근로 확대 등을 골자로한 노동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요. 당신은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혹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입니다.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수치는 약 80%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성과', '재량', '탄력', '확대' 등 노동개혁의 긍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어휘들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노동개혁의 한 면만을 보여준 채 질문을 한 것입니다. 만약 이 질문에 '일반해고 신설', '기간제 사용 연장', '통상임금 제외 수당 법제화' 같은 노동개혁의 다른 한 면을 함께 보여주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이번에도 80%가 긍정적으로 대답했을까요. 아마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여론조사 결과만이 진리인양 말하고 있는 것도 대단히 부적절합니다. 대통령은 노동개혁을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부정적 의견이 더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이 수치는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한국갤럽과 리얼미터의 조사시점보다 2개월 후인 지난 11 14~15일 온라인 미디어 imTV와 여론조사 전문기관 윈지코리아 컨설팅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노동개혁에 대해 국민 2명 중 1(48.4%) '해고가 쉬워지는 등 나쁜 측면이 많은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노동개혁(38%)보다 재벌개혁(52%)이 먼저라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조사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이렇게 다르게 나타납니다. 결국 여론조사라는 것은 참고사항에 불과할 뿐 그 자체가 민의를 대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수치와 결과만을 부각시켜 그것이 마치 국민의 뜻인양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한번 언급했듯이 노동개혁 5대 법안과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은 어디까지나 서민이 아닌 대기업과 기득권을 위해 설계되어 있는 법안들입니다. 겉으로는 '경제' '민생'을 내세운 서민경제활성화 법안처럼 비춰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쉬운 해고, 시간제 일자리와 비정규직 양산, 기존근로자의 임금 삭감, 공공부문의 영리화, 재벌 대기업의 경영권 강화, 기업의 지배구조 강화 등이 포함된 반노동자, 반서민 법안들인 것입니다.


ⓒ 한국노동방송



대통령은 특정 지역과 계층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과 권력을 사사로이 사용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대통령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계승 발전시키고, 법치를 준수해야 할 책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대통령의 마음 속에는 특정 지역과 계층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이익만을 대변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욱이 대통령에게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법치를 확립하겠다는 의지마저 발견하기 힘듭니다.


대통령은 경제활성화 법안의 처리가 지연되는 것이 국회의 직무유기이며 국민에 대한 도전이라고 맹렬히 성토했습니다그러나 관련 법안의 본질을 왜곡하고 민의를 기만하고 있는 것은 국회가 아니라 바로 대통령 자신입니다대통령이 구중궁궐에서 벗어나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면 도저히 저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은 국회가 아니라 다름 아닌 이 나라의 대통령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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