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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나경원의 국회연설은 왜 혹평 받고 있나

ⓒ 오마이뉴스

 

참 뻔뻔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4일 국회 교섭단체 연설을 보며 든 생각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에게 보수혁신의 가능성을 열었다 평가받았던 과거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파격적 연설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장기 국회 파행에 대한 진솔한 사과와 미래를 향한 건설적인 담론 정도는 제시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사과는커녕 일말의 미안함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석 달 가까이 국회를 공전시킨 책임이 있는 제 1야당 원내대표의 연설이라고는 믿기 힘든 몰염치함이다. 명색이 공당의 원내대표라면 무려 84일 간 이어진 국회 파행에 대해 국민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볼썽사나운 국회의 모습에 속 터지는 국민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경원 원내대표는 사과는 건너뛴 채 연설의 대부분을 '기승전-문재인 정부 비판'에 매달렸다. 대안과 비전은 제시하지 않고 오직 대통령과 정부 비판을 통해서 반사이득을 얻으려는 속내를 드러낸 것.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대한민국의 오늘을 규정하는 단어로 '불안'을 꼽았다. 그는 '붉은 수돗물', '은명초 화재사건', '세금폭탄', '경제위기', '한일관계', '정치불안' 등을 거론하며 "국민들이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다"라고 정부·여당을 겨냥했다. 대통령이 "국민을 편가르기 하고 국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날 연설에서 특히 논란이 됐던 대목은 나 원내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신독재'라고 몰아세우는 장면이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이 아닌 정권의 절대권력 완성을 위해 민주주의를 악용하고 있다"라며 "이것이 바로 이코노미스트지가 말한 '신독재' 현상과도 부합한다"라고 주장했다.


기가 차다. 나 원내대표가 인용한 기사는 지난해 6월 영국 시사주간지 'The Economist'에 실린 'After decades of triumph, democracy is losing ground'라는 제목의 기사다.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코노미스트'는 이 기사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 퇴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가 보도한 민주주의의 퇴보 과정은 '첫째, 위기 상황이 발생하고 유권자들은 그들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지지한다', '둘째, 이 리더는 적을 찾는다', '셋째, 그는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독립 기구들을 방해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권자들이 자신을 몰아내는 것을 어렵게 하기 위해 법을 바꾼다' 등 4단계다.


'이코노미스트'는 "처음 세 단계에서는 여전히 민주주의지만, 마지막 단계의 어느 지점부터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며 필리핀, 폴란드, 러시아, 터키 등의 국가를 예로 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기사에는 막상 대한민국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경원 원내대표에게는 달리 보이는 모양이다.


그는 "문재인 정권 2년,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비판 세력 입막음의 연속이었다"라며 "정권을 비판하면 독재, 기득권, 적폐로 몰아간다"라고 비난했다. 이어 "공영방송을 정권 찬양방송으로 전락시켰다"라며 "대법원, 헌법재판소, 착착 접수해가고 있다. 걸림돌이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사회 전체를 청와대 앞에 무릎 꿇리겠다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또한 "마지막 퍼즐은 지난 패스트 트랙 폭거로 현실화됐다. 야당의 당연한 저항에 저들은 빠루와 해머를 들고 진압했다.그리고 경찰을 앞세워 집요하게, 마지막까지 탄압한다"라며 "차베스의 집권과 절대 권력화도 민주주의 제도 위에서 이뤄졌다. 이대로라면 문재인 정권도 방심할 수 없다. 독재는 스스로 독재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야당의 경고에 귀 기울이라"라고 쏘아붙였다.

 

ⓒ 오마이뉴스



자가당착과 후안무치, 그리고 적반하장까지. 참 가지가지다. 자신들이 집권했던 시절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비판과 쓴소리를 멀리했던 보수정권 9년 동안 민주주의 환경이 크게 후퇴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 시기 표현의 자유·집회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이 크게 위축됐고, 인권과 언론자유 등이 뒷걸음쳤다.


보수정권은 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고 언론장악을 위해 미디어법을 날치기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인이 대량 해고당하는가 하면, 문화계 좌파 척결이라는 미명 아래 블랙리스트 명단에 이름이 오른 단체와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감시와 배제, 차별이 잇따랐다.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하는 천인공노할 일도 벌어지기도 했다. 검·경은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기에 급급했고, 당시 집권당이던 새누리당(현 한국당)은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무력화시키며 정권 비호에 앞장섰다. 


대법원이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시도한 정황도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청와대가 KBS에 외압을 행사한 정황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세월호 수사 방해와 외압 의혹을 받고 있다.


국정원과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도로 민간인 사찰도 이뤄졌다.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국민들에겐 '종북' 딱지가 덧씌워졌다. 국민을 '애국세력'과 '종북세력'으로 이분화시키는, 보수정권이 애용해온 갈라치기 전략이다.


그렇게 보면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유화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부활시킨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이야말로 나 원내대표가 '이코노미스트' 기사를 인용해 언급한 '신독재'의 원조라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새누리당은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겠습니다.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겠습니다. 빈곤층, 실업자, 비정규직,단시간 근로자, 신용불량자, 영세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장애인, 무의탁노인, 결식아동, 소년소녀 가장, 다문화가정, 북한이탈주민, 이런 어려운 분들에게 노선과 정책의 새로운 지향을 두고, 그 분들의 통증을 같이 느끼고, 그 분들의 행복을 위해 당이 존재하겠습니다."


3년 전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보수여당임에도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서 부자·대기업 증세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회적 약자와 소외층을 위한 정책 강화 등을 제안해 정치권 안팎의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당시 연설은 보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숱한 화제를 낳았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지난 3월에 이어 이번에도 맹목적인 비판과 저주에 가까운 독설로 정부 때리기에 급급했다.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이 국정 현안과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회적 의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밝히고, 건설적인 대안과 비전을 보여줘야 하는 자리임을 생각하면 실망스럽다는 평가다. 


모두가 다 아는 것처럼 독재는 보수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 벌어졌다. IMF 사태로 경제가 폭망한 것도 보수가 집권할 당시의 일이다. 연일 경제위기를 부르짖고 있는 한국당의 말과는 달리 각종 경제지표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와 비교해 결코 나쁘지 않다. 남북관계 역시 비교가 무의미한 수준이며, 한미동맹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처럼 전례 없이 굳건한 상태다.


되레 일각에서는 경제위기를 조장하고, 남북관계를 분탕질하고, 한미공조를 이간질시키고 있는 건 한국당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무조건적인 반대와 몽니로 정부정책을 가로막고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냉전주의적 행태로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제 1야당 원내대표의 연설에 혹평이 쏟아지는 이유일 터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후신이자, IMF 외환위기로 국가와 국민을 나락에 떨어뜨린 정당, 국정농단을 방조·묵인하며 국민으로부터 탄핵까지 당한 정당이 할 얘기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비판은 때와 장소, 처지 등을 감안해 해야 한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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