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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셀프 수습' 카드 꺼낸 김 대법원장, 그가 명심해야 할 것들

오마이뉴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추가조사위)의 조사보고서 결과를 두고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특히 추가조사위의 결과 발표에 대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서로 엇갈린 입장을 내놓으며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앞서 22일 추가조사위는 법원행정처가 2015년 원세훈 전 국정원장 항소심을 앞두고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진보성향 판사들의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했으며, 특정 법관들의 개별 동향과 성향 등을 파악한 문건 등을 작성했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23일 대법관 13명은 입장문을 통해 "일부 언론은 대법원이 외부기관의 요구대로 특정사건을 전원합의체로 회부해 원심판결을 파기함으로써, 외부기관이 대법원의 특정 사건에 대한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대법원이 이에 영향을 받았다는 취지로 보도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어 "대법원은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소부의 합의를 거친 결과 증거 법칙을 비롯한 법령 위반의 문제가 지적됐고, 이 사건이 갖는 사회·정치적 중요성까지 아울러 고려했다"며 "전원합의체에서 논의할 사안으로 분류하여 심리에 따라 관여 대법관들의 일치된 의견으로 판결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입장문에 등장하는 외부기관은 '청와대'를 의미하며, 특정사건은 2012년 대선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 대한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을 일컫는다. 대법원은 2015년 7월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바 있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례적으로 '13대 0' 만장일치로 원심을 뒤짚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파기환송심을 담당한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김대웅 부장판사)가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혐의 모두 유죄를 인정해 원 전 원장에게 징역 4년에 자격정지 4년을 선고함으로써 체면을 구기게 됐다. 국민들은 물론이고 사법부 내부에서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대법원 판결을 결과적으로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뒤집은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추가조사위의 결과 발표에 대한 대법원의 입장문은 당시 전원합의체 판결 과정에 어떠한 외압이나 부당함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원 전 원장 판결과 관련 청와대와 대법원이 교감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파기 판결은 전원합의체의 숙고를 거쳐 나온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우 전 수석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특검 수사과정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청와대와 사법부 사이의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다고 합리적으로 의심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추가조사위의 조사로 드러난 것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이다. 추가조사위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의 핵심 인물로 지목받는 임 전 차장의 컴퓨터는 조사하지도 못했다. 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에 있는 문서 중 760여개의 파일은 비밀번호가 설정돼 있어 열어보지 못했고, 파일 가운데 300여개는 이미 삭제된 상태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추가조사위의 조사는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뤄졌다. 핵심 인물의 컴퓨터는 조사조차 하지 못했고, 상당수의 파일이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거나 삭제되었다면 드러난 내용 이상의 것들이 컴퓨터 안에 담겨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미다. 그동안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법원 내부의 현직 판사들까지 나서 사법부 독립과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국민들이 사법부의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충격에 빠져있는 상황임에도 최고의 사법기관이라 할 수 있는 대법관들은 진솔한 사과나 성찰보다 조직지키기에 우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간과한 채 단지 자신들과 청와대의 유착이 없었다는 항변을 나열하기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법원의 행정과 사무를 총괄하는 법원행정처 주도로 판사들에 대한 사찰이 행해지고, 사법부가 외부의 압력에 휘둘린 정황이 드러난 것 치고는 참으로 '나이브'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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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법원의 입장문에 대해 비판 여론이 비등해진 가운데 김 대법원장이 24일 추가조사위의 결과와 관련해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날 김 대법원장은 '대국민 입장문'과 함께 법원 전산망 내부게시판에 '법원 내부 입장문'을 따로 밝혀 눈길을 끌었다. 사법부를 향해 뜨겁게 분출되고 있는 국민적 불신을 해소시키고 극심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는 법원 내부의 혼란을 봉합시키려는 취지로 보인다.

김 대법관은 입장문에서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나온 문건들의 내용은 대다수의 사법부 구성원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다"라며 "사법행정이라는 이름으로 권한 없이 법관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성향에 따라 분류하거나, 재판이 재판 외의 요소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오해받을만한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청와대와 법원행정처가 연락을 주고받은 사실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추가조사위 결과에 따른 후속조치와 근본적인 제도개선책 마련을 약속하기도 했다. 김 대법관은 "법원 스스로 이번 사안이 여기까지 밝혀졌듯이 앞으로도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면서 "사법행정, 재판제도, 법관인사 전반을 점검하여 모든 부분을 사법 선진국 수준의 투명한 시스템으로 대폭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요컨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등이 자체 조사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만큼 추가조사를 통해서 진상을 규명하고, 문제가 되고 있는 사법시스템 역시 전면적으로 개혁하겠다는 것이다.

김 대법원장의 입장문은 진솔한 대국민 사과와 함께 추가조사와 제도개선책 마련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 하다.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대법관들의 입장문이 나온 직후에 발표된 것이라 시의적으로도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당면한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주지하다시피 관련 의혹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의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임 전 차장의 컴퓨터는 물론이고 조사하지 못한 파일과 삭제된 파일 등 추가조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해야 할 사안들이 한 둘이 아니다. 사찰의 경위와 과정, 이를 지시한 윗선을 밝혀내는 일도 중요하며 당시 사법부 수장이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이 과정에 얼마나 개입했는지의 여부도 조사해야 한다.

대법원의 입장문에서 드러나듯 사법부 내부의 이해가 충돌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사법부 일각에서 추가조사위의 조사에 불만과 반발이 터져나온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런가 하면 추가조사위의 활동과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보수진영의 프레임 공세 또한 만만찮다. 사법부 자체조사를 통한 진상규명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김 대법원장의 의지와는 별개로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번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법관의 독립을 명시한 헌법을 정면으로 거스린 반헌법적이고 반민주적인 사건이다. 강도 높은 추가조사를 통해 국민이 납득할 만한 결과를 도출해내야 한다. 진상조사와 추가조사위의 조사로도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미 검찰이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김 대법원장과 양 전 대법원장, 고위법관 등이 고발된 사건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는 사법부의 추가조사 진행 추이에 따라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김 대법원장은 이번이 자체적으로 진상을 밝힐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기회를 잃는다면 검찰 수사는 물론이고 특검 수사까지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사법부의 권위와 위상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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