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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겐세이'도 모자라 '야지'까지, 한국당은 부끄럽지도 않나

ⓒ 오마이뉴스


실소가 터졌다. 이것도 웃음이라면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모르겠다. 웃을 일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삭막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감사한 건 또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은연 중에 나 역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보게 됐다. 덕분에 반성과 성찰을, 이 기회에 혹시 남아있을지 모르는 언어 습관까지 남김없이 버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조경태·이은재·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 이야기다. 

7일 오전 국회에서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 조 의원은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여당 의원들이 어제 '야지'를 놨는데 자제해야 한다"고 포문을 열었다. '야지는 '놀림', '야유' 등을 뜻하는 일본어식 표현이다. 그는 전날 있었던 예산 심사 과정을 문제 삼는 듯 했다. 장제원 의원이 이낙연 국무총리와 공방을 주고 받는 도중에 민주당 의원들이 야유를 하며 진행을 방해했다는 주장이었다. 

이 의원도 거들었다. 지난 2월 27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겐세이' 발언으로 여론의 따가운 질책을 받은 바 있던 그는 "오늘은 위원장께 간곡히 부탁드린다. 이렇게 동료 의원 질의에 야지 놓는 의원은 퇴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어 대잔치에는 장 의원도 합세했다. 그는 "어제 오늘 민주당 의원님들 모습이 과연 품격과 품위가 있었느냐"며 "자유한국당 의원님들 발언 때 야지 안 놓았냐. 왜 야당 의원들 질의할 때 검열을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겐세이'도 모자라 이제는 '야지'까지. 민의의 전당이라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일본어식 표현이 또다시 등장했다. 조 의원이 '야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박홍근·오영훈 민주당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의 품격을 거론하며 자제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조 의원에 이어, 이 의원과 장 의원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일본어식 표현인 '야지'를 자연스럽게 입에 담았다. 궁금하다. 이럴 것이라면 '겐세이' 논란 당시 사과는 왜 했는지. 

'오뎅'(어묵), '다마네기'(양파), '바께스'(양동이), '요지'(이쑤시개), '쓰메끼리'(손톱깎기), '쿠사리'(구박), '기스'(흠집).  생활 곳곳에 침투해있던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들이다. 해방 전후로 태어난 세대들은 부모세대들이 사용해왔던 언어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는 그들의 자식 세대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언어순화운동의 영향으로 이제는 저와 같은 일본어식 표현은 거의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본어식 표현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식민지배를 경험한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나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적 군사독재문화에 익숙한 장년 세대에게서 일본어식 표현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논란이 된 '겐세이'와 '야지' 역시 마찬가지일 터다. 일상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일본어식 표현들은 그 자체로 식민지배의 상흔이자 아픔이다. 혹독했던 일제강점기를 떠올리게 하는 치욕이며,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좌다. 


ⓒ 오마이뉴스


'겐세이'는 일본어식 표현이 우리와 얼마나 가깝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근한 예다. 당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겐세이'라는 말은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친숙한 표현이다. 친구들과 한 데 모여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당구를 칠 때 자연스럽게 사용하던 용어가 아니던가. 제국주의의 문화 침투, 세뇌는 그래서 무섭다. 식민지배의 잔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무의식적으로 사용한다. 고치기 힘들 뿐더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교육을 통해, 시민운동 등을 통해 일본어식 표현들을 지워내려는 노력들이 지속돼 온 터였다. 그 결과 앞서 예를 들었던 표현들은 이제 일상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사회공동체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언어순화에 앞장섰던 탓이다. 그러나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누구보다 솔선수범해야 할 국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상황에 맞는 다른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본어식 표현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며 물의를 빚고 있다. 

이미 한차례 '겐세이' 소동을 경험한 대중들에게 '야지' 논란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이번에는 분노보다 자조와 냉소적인 반응들 일색이다. 관련 기사에는 역시나 '겐세이당' 답다는, 그들이 즐겨쓰는 표현을 빌자면 '야지'가 잇따르고 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예결위 회의에서 식민지배의 잔재를 또다시 목격했으니 대중들의 야유와 조소가 잇따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겐세이' 발언의 엄청난 후폭풍을 상기하면 이번 논란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새다. 부적절함을 지적하는 동료 의원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일본어식 표현을 보란 듯이 사용했다. 언어는 한 개인 혹은 집단의 사고를 투영하는 거울이다. 그들은 대중이 사용하지 않는 어휘를 무심코 사용함으로써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의식의 일부를 드러내 보였다. 전근대적이고 반교육적이며, 퇴행적인.

장 의원은 이날 민주당 의원들의 '품격'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겐세이'와 '야지' 소동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뿌리 뽑아야 할 식민지배의 흉물들을 국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야말로 국회의 품격을 훼손시키는 구태다.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 아니다. 한국당 의원들은 자신들이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똑바로 직시하기 바란다. 국민은 대한민국의 이름에 걸맞는 품격있는 국회의원을 가질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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