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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개헌 '동상이몽', 이러니 개헌이 잘 될 턱이 있나

ⓒ JTBC 화면 갈무리


"저는 개헌 필요해요. 우리 헌법, 모든 나라의 헌법은 기본권 조항이 한 덩어리가 있고, 권력구조가 한 덩어리가 있잖아요. 근데 지금 말씀하시는 거는 기본권 조항 이런 거 다 내버려 놓고 대통령 4년 중임제로 바꾸고 그리고 국무총리를 통해서 내각을 구성하고 내치를 담당할 권한을 국회의원들이 가지겠다는 거 아녜요. 언제 국민들이 그러라고 그랬습니까? 국회의원들이 대통령보다 뭐가 잘났어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이 내려진 지난 10일 밤, JTBC의 특집토론 '탄핵 이후 대한민국, 어디로 갈까'에 패널로 참석했던 유시민 작가의 일침이다. 유 작가는 이날 토론의 말미에 정태옥 자유한국당 의원이 탄핵 사태는 대통령제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이날 정 의원은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대통령 4년 중임제'로 바꾸고, 국회가 선출하는 총리가 내각을 통괄하는 부분은 헌법의 두 조항만 바꾸면 된다고 주장했다. 정치권에서 끊임 없이 제기돼온 권력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하는 '원포인트 개헌'을 부각시킨 것이다. 정 의원의 말이 끝나자 마자 유 작가는 즉시 브레이크를 걸었다. 차분한 논조로 시작된 발언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격앙됐고 목소리의 톤도 높아져 갔다.

"근데 개헌에 관해서는 제가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게 헌법이 잘못해서 이 사태가 났나요? 헌법에 죄가 있어서 이 사태가 났어요? 그리고 전직 대통령 한 분 돌아가신 분이 헌법이 잘못돼 가지고 돌아가셨어요? 후임자가 구박해갖고 돌아거신 거 아녜요. 지금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이 헌법의 잘못이 아니고 헌법을 제대로 운용 안 한 잘못이에요. 대통령이 헌법을 안 지켜서 탄핵이 됐는데 헌법이 잘못됐으니까 헌법을 고치자고 얘기하는 거예요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개헌에 대한 유 작가의 소신은 분명해 보인다.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유 작가 역시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현재 정치권에서 추진되고 있는 개헌 움직임이 지극히 정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실제 개헌은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에 따라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그러나 이 첨예한 논쟁의 핵심은 당위의 문제가 아닌, 시기와 내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즉 개헌의 필요성에는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15일 더불어민주당을 제외한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 원내교섭단체 3당이 대통령 선거일인 5월9일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합의했다. 3당 원내대표가 합의한 개헌안은 4년 중임의 분권형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다. 유 작가가 언급한 대로 대통령이 외치를 담당하고 내치는 국회가 선출한 총리가 책임지는 구조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의 역할을 축소되고 상대적으로 국회의 권한은 강화된다.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헌법은 국민의 삶을 틀짓는 최고 규범이다. 충분한 공론과정과 국민적 합의를 거쳐서 추진되어야 한다. 3당의 오늘 합의는 대선 포기 정당들의 정략적 뒷다리걸기이자, 용꿈을 포기한 총리 지망생들의 권력 야합 모의다. 그 점에서 최순실 게이트 덮으려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카드와 다르지 않다. 개헌을 정치적 불쏘시개로 활용하려는 3당 야합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3당 원내대표의 합의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3당 합의가 정치공학적 야합이자 모의라는 것이다. 이는 유 작가의 견해와 일치한다. 3당 합의에 대한 비판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당내에 개헌 찬성 세력이 상당한 민주당 역시 3당 합의를 비판했다. 윤관석 수석대변인은 "한마디로 정략적이고 선거용이다. 국민은 안중에 없다"고 합의를 평가절하했다. 

유력 대선주자들 역시 비판적 메시지를 내놨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3당의 개헌안 합의를 "국민주권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비판했고,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역시 "국민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개헌은 반대한다"고 밝혔다.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또한 "개헌 말고 개혁"이 우선이라며 3당 합의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개헌안에 합의한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유력 대선 후보들조차 3당의 개헌 합의에 비판적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오마이뉴스


그렇다면 대선 전 개헌 움직임에 반대 기류가 형성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법이 가로 놓여있다. 개헌에 찬성하는 이유가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야권으로의 정권교체를 반대하기 위해 개헌을 추진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문 전 대표의 집권을 막기 위해 개헌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부류도 있다. 그런가 하면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시대적 당위 때문에 개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당과 바른정당은 정권교체를, 국민의당은 문 전 대표의 집권을 막기 위해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림이 없다. 이 둘은 개헌을 명분으로 특정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겠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다. 반면 민주당 개헌 찬성파 일부와 앞서 언급했던 유력 대선 주자들, 그리고 대선 전 개헌을 정략적이라 비판했던 유 작가 등은 개헌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하지만 졸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개헌 움직임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내용적으로도 불순한 의도라는 주장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개헌을 밀어붙이고 있는 각 정당 안에서도 목소리가 제각기 분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력 대선 주자인 안 전 대표와 유 의원은 3당 합의가 무색하게 다른 의견을 내고 있고,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국민의당 내부의 의견 역시 크게 엇갈리고 있다. 박지원 대표는 개헌을 고리로 한국당과 손을 잡은 것에 반대 의사를 나타냈고, 손학규 전 대표 역시 부정적인 뜻을 피력했다. 여기에 민주당 내의 개헌파 역시 대선 전 개헌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태다.


원내 1당인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3당의 개헌안 합의만으로는 개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3당의 의석수를 합친 165석으로 개헌안의 발의는 가능하지만 본회의 의결 정족수인 200석을 채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헌안에 합의했던 국민의당 내부에서조차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3당이 추진하고 있는 개헌 움직임이 탄력을 받기는커녕 외려 급격히 힘이 빠지고 있는 모양새다. 국민 여론 역시 개헌에 부정적이다. 개헌에는 찬성하지만 시기는 대선 이후에 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대선 전 개헌이 사실상 물건너 갔다는 전망도 나온다. 


애시당초 개헌이 집권연장을 위한 수단이자 유력 후보의 집권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개헌 논의가 권력구조 개편과 정계개편만을 염두해 둔 정치공학의 산물이었던 데다가, 국민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그들만의 개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헌을 고리로 뭉쳤으면서도 그들 각자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으니 개헌이 뜻대로 추진될 턱이 없는 것이다. 


"문재인 전 대표가 혹시 대통령이 되면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문재인 대표보다 더 낫거나 못하냐. 거기서 거기예요. 근데 대통령 권한을 뺏어서 국회한테 주면 더 잘할 것 같다고요? 국회가 청와대보다 일 잘했어요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국회에 대한 신뢰도가 정부보다 높아요? 더 낮아요. 신뢰도 조사를 해보면."


유 작가는 정치권의 개헌 움직임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국회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개헌은 국민의 기본권을 더욱 신장시키고 권력구조와 선거제도, 지방자치 등 시대적 담론을 담아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개헌이 당장 눈 앞으로 다가온 대선판을 흔들고 권력구조를 바꿔 정권연장을 꾀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된다면, 이는 탄핵 정국에서 드러난 촛불민심을 왜곡하고 기만하는 행위나 다름 없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시스템 자체보다 그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람이 더 문제임을 환기시켜 주었다. 헌법은 죄가 없다. 다만 시대적 가치와 충돌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가 개헌보다 '개혁', '적폐 청산'에 힘을 쏟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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