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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강한 야당 되겠다는 안철수의 착각

ⓒ 오마이뉴스


"우리는 정권이 바뀌자 거꾸로 펼쳐지는 코드 인사 등 문재인 정부의 모든 불합리에 맞서 싸울 것이다. 우리의 길은 철저하게 실력을 갖추고 단호하게 싸우는 선명한 야당의 길임이 분명하다. 실천적 중도개혁 정당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겠다. 배타적 좌측 진영이나, 수구적 우측 진영에 매몰되지 않겠다. 대한민국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하는 주변세력, 상황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무능과도 싸울 것이다. 벌써 독선과 오만에 빠져 있는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국민이 야당에게 준 제1의 과제다. 국민의당은 유능한 야당으로 거듭 나겠다."

27일 열린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신임 당대표로 선출된 안철수 대표의 대표 수락 연설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중도개혁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강화해 나가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하고 선명한 야당이 되겠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당대표 출마 선언 당시 화제가 됐던 '극중주의'를 견지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독선과 오만을 견제하는 '강한 야당'이 되겠다는 거다.

안철수 대표의 취임 일성을 보며 새삼 느끼는 건 사람의 성향은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안철수 대표는 당안팎의 날선 비판을 무릅쓰고 출마했고, 결국 살아 돌아왔다. 그런 안철수 대표의 정치적 지향점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극중주의'다. 그런데 개념조차 생소한 '극중주의'는 과거 안철수 대표가 강조해온 '합리적 개혁주의' 노선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 개혁 노선이 훗날 '기계적 양비론'으로 비판받았던 것을 상기하면 '극중주의'를 앞세운 안철수 대표의 정치 행보를 예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강하고 선명한 야당이 되겠다는 결기 역시 정치 입문 이후 나타난 안철수 대표의 성향에 미루어 볼 때 아주 낯익은 '클리셰'다. '강하고 선명하게'라는 수사의 이면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내포돼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다. 안철수 대표가 기성정치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반감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새정치'의 동력으로 삼아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새정치민주연합과 국민의당 창당을 거치며 '반문정서'를 적극적으로 주창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안철수 대표는 기성정치와의 차별화를 통해 유권자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성정치의 부정적 측면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으로 정치적 이득을 취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 대표의 새정치는 그 자신이 기성정치에 누구보다 빠르게 동화돼 감으로써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폐쇄적 정당구조, 정치공학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리던 정책과 노선, 양비론에 기댄 애매모호한 태도는 국민이 기대했던 새정치와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특히 당을 존폐위기로 내몰았던 제보조작 사건은 신기루 같던 새정치의 실체와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방증이나 다름이 없었다. 바닥을 기고 있는 정당 지지율은 '안철수식' 새정치에 실망한 국민의 염증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그런데 다시 '안철수'다. 당이 직면한 위기를 헤쳐나갈 적임자라며 스스로를 '셀프' 소환한 안철수를 당원들은 기꺼이 당대표로 선택했다. 당을 살려야 한다며 당의 몰락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을 재등장시키는 멋쩍은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이 역설적 상황은 국민의당이 처해있는 위기의 본질을 말해준다. 누가 뭐래도 국민의당이 '안당'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 않는 조직(組織)은 괴사하기 마련인 법. '안철수' 외에는 딱히 대안이 없는 현실은 국민의당의 암울한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오마이뉴스


그러나 정작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기성정치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을 상쇄시킬 대안으로서 정치인 '안철수'의 매력은, 본인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이는 대다수의 정치 전문가 및 평론가들 역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 정두언 전 의원은 "안 전 대표는 '지는 해'도 아니고 '지는 달'이다"라며 "출마는 자유지만 돼도 문제고 안 돼도 문제다. 당 대표가 돼도 '안철수당'이 앞으로 큰 역할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단칼에 정리한 바 있다. 새정치를 앞세워 기성 정치판을 씹어먹던 과거의 '안철수'가 더이상 아니라는 얘기다.

안철수 대표가 기성정치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새정치의 환상이 깨져버린 현실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새정치의 참신함에 환호하던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은 이제 실망과 염증으로 바뀐 상태다. 특히 지난 대선과정과 제보조작 사건을 거치며 드러난 민심이반의 징후들은 안철수 대표의 정치적 재기가 절대 녹록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 대표가 취임 일성으로 전략적 모호성을 답습하겠다는 자기고백을 한 셈이니 그나마 있던 일말의 기대마저 사라지는 느낌이다.

안철수 대표가 취임 수락 연설문에서 밝힌 내용은, 요컨대 기존에 해왔던 방식 그대로 정치를 해나가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한 중도지향 노선을 표방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실정과 실수에 편승해 야당으로서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겠다는 거다. 이쯤되면 '중도'를 고집하는 안철수 대표의 집착은 거의 강박 수준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중도란 어떤 사안이나 현안에 대한 입장을 취하는 과정에 우연히 얻게 되는 지위다. 그런 면에서 밑도 끝도 없이 중도적 입장을 취하겠다는 건 달리 말하면 '생각이 없다'거나 '비겁하다'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중도는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강하고 선명한 야당이 되겠다는 것도 따져볼 일이다. 작금의 국민의당은 제보조작 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상태다. 검찰 수사 결과 당지도부의 개입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관련 사실을 무작정 공개한 잘못까지 사라지는 것을 아닐 터다. 그러나 국민의당은 아직까지 이 사건에 대해 누구 하나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안철수 대표의 경우 제보조작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준서 전 최고위원과 이유미씨가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책임이 더욱 무겁다고 할 것이다. 안철수 대표의 당대표 경선에 출마 소식에 당안팎의 우려와 비판이 잇따랐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철수 대표는 정부여당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이 "야당의 제1과제"라고 밝혔다. 그러나 제보조작 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은 국민의당이 강한 야당이 되겠다고 천명하는 것이 시의적으로 적절한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제보조작 사건으로 드러난 낡은 정치의 사슬을 끊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의당은 창당 이후 민주당내의 '반문정서'를 끊임 없이 부추기는 전략으로 반사이득을 챙겨온 전례가 있다. 그와 같은 정치공학적 행태가 제보조작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제보조작 사건에 대한 의혹이 완전히 가시질 않았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안철수 대표의 인식은 당내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뿐더러 국민의당을 바라보는 심드렁한 국민 정서와도 크게 상충된다. 지금은 낮은 자세로 묵묵히 내실을 다지며 신뢰 회복에 나서야 할 때이지, '강한 야당론'을 앞세워 정부여당에 각을 세울 때가 아니다. 도덕성에 커다란 의문부호가 붙어있는, 고작 지지율 5%의 정당이 지지율 80%의 문재인 정부에 맞설 입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자각과 성찰에서 비롯된다.  이번이 국민의당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부디' 잊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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