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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가슴이 미어져? 박근혜의 착각 혹은 위선

"촛불시위(인원)의 2배가 넘는 정도로 많은 분들이 참여하신다 듣고 있는데, 그 분들이 왜 눈도 날리고 추운데 계속 나오시게 됐는가를 생각한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야 한다', '법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고생도 무릅쓰고 나오신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좀 미어지는 심정이다"

지난달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규제TV'와의 돌발 인터뷰 도중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 대해 밝힌 소회다. 박 대통령은 당시 "최근 2주 동안에는 태극기 시위가 오히려 더 많아졌다. 인원 수도 많고 열기도 굉징히 뜨거워졌다. 약간 위로 받으시는가. 어떤 기분인가"라는 질문에 촛불집회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평가를 곁들이며 저렇게 말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부적절했다고 비판받았던 '박 대통령의 육성 반격'에서는 이처럼 박 대통령의 집회·시위에 대한 인식이 엿보인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는 심리가 박 대통령에게서 발견되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주의력 착각'이라고 규정한다. 자신의 관심사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경우를 말한다.

박 대통령이 딱 그 짝이다. 손발이 다 묶인 고립무원 같은 처지인 박 대통령에게 '탄핵반대'를 외치는 '태극기 집회'가 큰 위로와 위안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10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촛불집회와 그 저의와 순수성을 의심받고 있는 '태극기 집회'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주의력 착각'이 빚어낸, 사실관계의 심각한 오류이자 왜곡이다.

지난달 31일 청와대가 삼성·현대자동차·SK·LG 등 재계 서열 1~4위 기업들로부터 돈을 받아 어버이연합·고엽제전우회·엄마부대 등 극우단체의 관제데모를 집중 지원해온 사실이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의해 밝혀졌다. 지난 2014년부터 청와대 정무수석실 소속 신동철·정관주 당시 비서관과 김완표 삼성 미래전략실 전무,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 등이 수시로 모여서 지원 대상과 액수를 논의했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시로 이루어진 관제데모 모의를 통해 지난 3년 동안 청와대가 4대 재벌로부터 거둬들인 돈만 7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청와대는 이 돈으로 관변단체들을 동원해 세월호 유족 비난 집회, 국정교과서 찬성 집회, 노동법 개정안 찬성, 기업 지배구조 관련 상법 개정안 반대 등 '친정부·친재벌 집회'를 열어왔던 셈이다.


ⓒ 오마이뉴스


특검팀이 밝혀낸 내용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이미 지난해 4월 불거진 '어버이연합 게이트'를 통해 청와대와 전경련, 관변단체들의 검은 커넥션 의혹이 세상에 드러났고, 지난달 23일에도 청와대가 국내 최대규모의 보수우익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에 관제데모를 지시했다는 언론보도도 나온 상황이다. 여기에 박 대통령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던 '태극기 집회' 역시 참가들에게 통상 2만원이 지급되고 추운 날은 6만원, 유모차를 동원하면 15만원을 준다는 관계자의 증언까지 보도된 마당이다.

기실 관제데모와 관련한 '수상한 소문'들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세간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무엇보다 단체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자금의 출처가 지극히 불분명했을 뿐 아니라 집회의 성격과 내용 역시 비상식적일 때가 많았다. 집회에서 보여준 호전적이고 과격한 막가파식 기행 등이 도마위에 오르기도 했고, 관련 사건을 수사해야 할 검찰의 봐주기 행태 역시 의아했다. 관변단체의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을 것이란 의구심이 끊이질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예상은 비켜나지 않았다. '청와대-재벌-관변단체'는 한통속이었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청와대가 기획하면 재벌은 필요한 자금을 댔고, 관변단체들은 '일당백'의 전사가 됐다. 이 장면은 기시감이 있다. 돈으로 군중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관제데모는 권위주의 시절 횡행하던 구시대의 유물이다. 진작에 사라져야 했을 낡은 악습이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부활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체화한 시민에게는 끔찍한 '악몽'이 그러나 박 대통령에게는 기분좋은 '춘몽'이 되는 모양이다. 청와대가 기획·주도한 관제데모의 전모가 속속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박 대통령은 '태극기 집회'를 호도하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법치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했다.

가당찮다. 지난달 25일 정규재TV와의 인터뷰 전 이미 청와대가 보수단체의 관제데모를 지시했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된 상황이었다. 어디 이뿐인가. 지난해부터 관제데모와 관련해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어온 터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 김 전 비실장이 깊숙히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특검팀에 의해 드러났다 . 박 대통령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여전히 딴소리다. 위선이 아니라면, 심각한 '주의력 착각'에 빠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는 국가 지도자의 심각한 자질 문제다. 위선은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어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자리인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대통령에게는 이념과 지역, 계층과 세대를 아울러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외려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혼란을 이끄는 모양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에 혼란과 갈등이 끊이질 않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헌법을 위반한 혐의로 탄핵심판을 받게 된 대통령이 어이 없게도 민주주의와 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관제데모에 동원된 사람들을 보며 연민의 정을 표하고 있다. 한 편의 코미디가 따로 없다. 홀아미 마음은 과부가 안다더니, 참으로 애절한 '동병상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모습을 봐야하는 다수 시민의 가슴이 찢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이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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