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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법원은 어제 대한민국의 헌법을 유린했다



법은 곧 정의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명징한 선언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법은 결단코 정의가 될 수 없다. 어제(16일) 대법원은 법은 더 이상 정의의 편이 될 수 없음을 만천하에 선언했다. 대법원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정치 개입 혐의에 대해 결국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국정원 직원들이 사용한 트위터 계정이 담긴 전자우편 첨부파일인 '425지논'과 '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다"는 논리파괴형 판결로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한몸에 받았던 1심과 마찬가지로 대법원은 심리전단 직원들이 이명박 정부의 국정을 홍보하고 야권 대선 후보를 비방하는 활동을 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과 직원들이 정치에 관여했거나 선거운동을 한 것인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법이 정의가 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상식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법이 존재해야 할 최소한의 이유이자 당위다. 그런데 이 나라의 법은 상식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과를 무시한 대법원의 판결은 그래서 민망하고 낯뜨겁다.


대법원의 판결은 비논리적이며 비양심적인 언어도단의 극치를 보는 것만 같다. 말같지 않은 말들을 늘어놓으며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등의 국가기관들이 지난 대선에 조직적으로 불법 개입했다는 구체적 증거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범위를 '425지논'과 '시큐리티' 파일로 한정한다 해도 국정원의 정치 개입과 선거 개입을 입증할 연결계정 1157개, 78만6698건의 트위터 글들을 찾아낼 수 있다. 혐의를 입증할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대법원은 이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판결은 살아있는 권력을 겨누어야 하는 재판의 성격상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유죄가 대법원의 판결로 확정되면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과 정당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로 집권여당 원내대표의 목을 날려버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시무시함 앞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해야 하는 역사적 판결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법관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다. 현재의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모두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관은 최종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사고와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임기까지 모두 10명의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적 다양성을 무시한 채 정권의 입맛에 맞는 보수적인 인물들만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불씨를 없애는 안전장치까지 마련해 둔 것이다. 


희대의 선거사범이었던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무죄를 선고받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정원 직원 김하영의 선거개입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결과를 은폐하고 축소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았던 그에게도 범죄 사실을 입증할 증거들은 차고도 넘쳤다. 그러나 '국정원을 포함한 국가기관들은 지난 대선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가이드 라인 앞에 법이니, 정의니, 상식이니 따위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에나 적혀있는 사문화된 가치들이 아니라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권력과 돈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맨얼굴이다. 





지난 대선에서 국가기관인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그들은 야당후보를 비난 하는 글들을 인터넷에 게시하며 여론을 호도하고 조작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대선에 불법개입한 국정원을 적극 옹호하며 NLL 논란 등의 공작정치를 통해 국면전환을 시도했고, 경찰에 부당하게 압력을 행사해서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한 허위기자회견을 하도록 만들었다. 경찰은 사건을 축소·지연했고 사건담당자에게는 외압을 행사했으며 관련증거자료를 삭제하기까지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법무부장관은 수사지휘권을 행사해 중대범죄 피의자의 구속수사를 방해했고, 청와대는 국정원 사건을 진두지휘하던 검찰총장의 프라이버시를 물고 늘어지며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지난 대선의 부정과 부당함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법은 지난 대선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대법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사법기관이며 사법정의와 시민의 인권을 지켜내야 하는 최후의 보루같은 곳이라고 배워왔다. 대법관은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정의와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있는 헌법기관이라고 들어왔다. 이제 저따위 허울뿐인 말들은 하수구에 내다버릴 때가 되었다. 법이 곧 정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대법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사법기관이며 살아있는 헌법기관이 될 수 없다. 정의와 양심을 버리고 권력에 굴복하는 정치적 판결을 남발하고 있는 대법원에게 저와 같은 빛나는 헌사는 사치이며 치욕이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유린했다면 대법원은 어제 대한민국의 헌법을 유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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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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