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고사 세대였던 필자에게 중·고등학교 시절은 지금 돌이켜보면 참 추억이 많았던 때였던 것 같다. 친구들과 축구하는 것이 뭐가 그리 좋았는지 10분 동안 주어진 짧은 쉬는 시간까지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고, 선생님 몰래 도시락을 까먹기도 하고, 야간자율학습 하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해보고, 빡빡 깎은 짧은 머리 조금이라도 길게 보이려고 매일아침 거울 앞에서 침 묻혀기를 마다 않고, 마주 보고있는 여학교 학생들에게 잘 보이려 엄마 향수 교복에 뿌리고 버스에 올라 타고, 여름방학 때 한달간 독서실 끊어놓곤 공부는 뒷전, 친구들과 밤늦게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아마 그때의 기억이 마음 한켠에 좋은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저 촌스러움이,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마냥 그리운 요즘이다. 영화 '써니'의 한 장면>


그 시절은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가진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 없는 놈이 가정과 학교로부터의 통제와 구속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들의 이런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선생님들은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시기는 했지만 '지금이 좋을 때다. 나중에 너희가 어른이 되면 지금 너희가 지긋지긋하다고 여기는 이 시절, 징글징글하다고 느끼는 이 시절을 반드시 그리워하게 될 날이 올게다.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좋은 추억 많이 쌓아 두거라'라며  말씀하시곤 했다. 당연히 선생님들의 그 말씀들은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한쪽 귀로 흘러 창문 밖으로 달아나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는.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던 가슴 속 뜨거움, 세상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까닭 모를 괜한 반항심 등이 뒤섞여있는 젊음이 요동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편지가 되어  마음 속에 도착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십 수년이 흐른 뒤였다. 그 편지는 세상을 알아가고, 사회를 경험하고, 직업을 갖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문득 거울 속에 내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둘 늘어가야지만 도착하는 신기한 편지였다. 벌써 오래 전에 내 마음 속에 배달된 이 편지를 이제야 보게 되다니, 그동안 참으로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온 것만 같다. 그때 그 시절, 철없었던 그 시절, 아무것도 없어도 친구들만 있으면 따뜻하고 배불렀던 그 시절을 다시금 꺼내 읽는다. 그때 그 녀석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그 녀석들도 이 편지를 보고 있을까? 


오늘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된 것은 사실 인터넷 신문 사회면의 <'영훈초등 입학' 축하 현수막 내건 영어유치원>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에서 '입시지옥'이란 말을 영원히 추방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올 수 있을까?  


필자 역시 '입시지옥'을 겪은 세대이다. 앞서 친구들과의 추억을 조금은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의 일탈에 불과할 뿐 입시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는 그때도 굉장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등교하면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10시까지 학교에 묶여 있어야 했다. 집에 오면 11시, 다시 그날 배운 것과 내일 배울 내용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면 새벽 2시였다. 매일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새벽같이 학교로 가야했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그때는 오로지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이유, 그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강요받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고등학교 시절을 영화로 옮긴 '말죽거리 잔혹사', 출처:구글이미지 검색>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가 있다. 1970년대 후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한 고등학교에 전학을 온 학생의 성장기를 통해 유신독재시절을 비판하고 있는 유하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에 극중 주인공(권상우)의 아버지로 나오는 천호진씨가 문제를 일으키는 아들에게 훈계하며 들려주는 말이 있다. 이 대사는 이 영화가 만들어진지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필자의 머릿 속에 각인되어 있다. 뒷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을 주는 이 대사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참으로 크다. 극중 아버지는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잉여인간 양산하는 사회


'영여인간'이란 말 그대로 남아도는 인간이란 뜻일게다. 다른 말로 하면 필요없는 인간, 가치없는 인간, 쓸모없는 인간이란 뜻도 된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을 숨쉬며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과 가치를 지닌 존재다. 한사람 한사람 모두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이다. 그런 인간의 가치를 저 단어는 단번에 무가치한 인간, 무능력한 인간, 불필요한 인간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게다가 영화 속 아버지의 말처럼 그 기준이 다름 아닌 대학진학, 그것도 명문대에 가느냐 못가느냐에 달렸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대관절 대학이 무엇이길래, 명문대가 무엇이길래 이것으로 사람의 등급을 매기고, 한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의 인생을 재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인이 피곤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글을 포스팅한 바 있다. 


 한국인이 피곤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 ☜ (클릭)


명문대를 나와야 인간대접을 받는 사회, '1등 지상주의'와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철저히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사회가 바로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명문대를 나오지 않으면, 1등이 아니면 모두 잉여인간이요, 자신을 제외하면 모두 잉여인간이 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사회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다. 급기야는 한 유치원에 이런 현수막까지 내걸렸다. 


 <영훈초등학교에 합격한 것이 그렇게도 내세울만한 것인가? 출처 : 한겨레>


 영훈초등학교 합격 현수막? 이건 도대체 뭐지?


영훈재단, 요즘 사회적으로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사배자전형' 문제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다. '자녀유학비용을 절감하고 양질의 교육환경을 제공할 것'이라는 당초 취지와는 다르게 '귀족학교'로 불리며 교육양극화를 부추기며 오히려 이곳에 입학하기 위해 조기유학을 다녀와야 하는 어이없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 현수막은 서울시내 한 유치원이 제작한 것으로 영훈재단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제로 영훈재단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영훈초등학교합격을 축하한다'는 이 현수막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영훈초등학교에 합격한 것을 유치원 차원에서 정말 축하해야하는 일일까? 


<수십년이 흘러도 현수막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 것만 같다. 출처:구글이미지 검색>


물론 이런 현수막은 예전에도 있었다. 필자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그리고 시간이 훨씬 흐른 그 뒤에도 입시가 끝난 뒤 고등학교 정문에 가면 '서울대 ○○명, 연·고대 ○○명' 등의 문구가 적혀있는 현수막이 으례히 걸려 있었다. 중학교도 마찬가지로 '○○외고 ○○명, ○○고 ○○명'등의 현수막이 걸리곤 했다. '입시위주','학벌위주', '성적위주'의 교육현실이 만들어낸 씁쓸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오늘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이어 유치원까지 이런 현수막이 걸리는 것을 보게 된다. 비록 해당 영어유치원이 "우리 학원은 영리 목적이 아니라 놀면서 편안하게 영어를 접하게 하는 대안학교 형식의 교육을 하고 있다. 아이를 격려하고 축하하기 위해 현수막을 걸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지만 모래씹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 능력있는 1명의 아이는 격려받아야 마땅하겠지. 공부잘하고 똑똑하고 재능있는 아이가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래야 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우리사회는 박수받는 1명을 만들기 위해 나머지 99명을 잉여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사회다. 단 1명이 나머지 99명을 위에 군림하고 이들을 거느리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다.  99명 역시 선택받은 1명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며 치열한 경쟁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사회다. 사회가 조장하고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조장된 사회시스템을 그대로 따라간다. 마치 대량 생산된 제품들 마냥 콘테이너 밸트 위에서 출하를 기다리는 사람들 같다. 이런 사회의 종극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말문이 막힌다. 아니 글문이 막힌다. 이 아이들이 자라고 어른이 되었을 때 아마 이들도 과거로부터 오는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은 어떤 편지를 받게 될까? 이 아이들은 지금의 이 때를 추억하며 훈훈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될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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