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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외면받는 세월호 청문회, 5공 청문회는 달랐다

ⓒ 대한민국 국회 


1988년 총선은 헌정사상 최초로 여소야대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합니다. 야당이 이를 통해 제5공화국의 비리를 조사하는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5공비리와 광주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문제 등의 진상조사를 실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대야소 구도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진상조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전국에 생중계된 '5공비리 청문회'였습니다. 이 역시 헌정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탓에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주목을 받았습니다.

'5공비리 청문회'는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던 정주영,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었던 장세동, 그리고 5공화국의 핵심인물인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들이 청문회의 증인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비록 증인들의 한결같은 모르쇠 답변과 후속조치 미흡으로 인해 절반의 성공으로 끝이 났습니다만, '5공비리 청문회' 5공화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한편,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높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5공비리 청문회'가 시민들의 열광적인 관심과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청문회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생중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은 역전에서, 터미널에서, 집에서 청문회를 숨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쩔쩔매던 5공화국 실세들의 모습과,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하는 장면 등이 방송을 통해 전달되었고, 방송이 끝난 직후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청문회에 대한 이야기로 날밤을 지새우고는 했습니다. 1988년 당시의 청문회 모습은 이랬습니다.



ⓒ MBC 뉴스


그로부터 약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2015 12월의 끝자락, 지금 어느 한켠에서는 세월호 청문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려 30년이나 흘러서일까요. 청문회를 둘러싼 환경들이 그 당시와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우선 지상파 3사가 생중계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당합니다. 전국에 생중계된 '5공비리 청문회'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가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청문회를 지상파 방송을 통해 볼 수 없다면 시민들의 관심이 그만큼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정부여당이 보여왔던 행태를 감안하면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입장은 늘 한결 같았습니다. 그들의 행태는 한마디로 '진실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대미문의 압도적 참사 앞에서도 관련 사실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기 바빴습니다. 그것은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부와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의 무능과 무책임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국가비상사태시 작동해야 하는 컨트롤 타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7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국가기밀로 남아 있습니다. 국회의 국정조사는 새누리당의 갖은 방해 속에 아무런 소득없이 끝이 났고, 세월호 특별법 역시 숱한 정치적 공세 속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반쪽짜리로 통과됐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새누리당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나타난 저들의 행태는 이 문장 하나면 모두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 JTBC 뉴스


이틀 전 시작된 세월호 특조위가 진행한 청문회에서도 같은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여당 측 추천 위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을 청문대상에 포함시킨 것에 항의해 참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청문회에 참석한 증인들은 하나같이 '기억이 안난다', '모르겠다'는 기계적인 답변과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을 늘어 놓기에 급급합니다. 청문회에 참석해야 할 증인들이 개인 일정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세월호 특조위의 초라한 권한을 생각할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청문회를 통한 진상 규명은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특조위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입니다.

세월호 청문회는 '5공비리 청문회' 당시와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청문회를 개최하는 주체와 그들의 의지입니다. '5공비리 청문회'가 당시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 5공 비리와 광주민주화운동 진상 등을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는 야당의 강력한 의지로 관철된 반면, 세월호 청문회는 그 반대입니다. 여대야소의 국면에서는 야당이 아무리 진상규명의 의지가 있다한들 한계가 따를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는 비단 세월호 청문회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국정원 사건사자방 비리청와대 비선실세 의혹성완종 리스트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5공비리 청문회' 역시 여대야소 국면에서 열렸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청문회 자체가 열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대야소에서 열리는 세월호 청문회가 빈쭉정이에 불과한 것은 그래서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현 야당에게는 진상규명의 의지가 있는 지도 불명확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진실은 휘발되거나 감추어지기 마련입니다.



ⓒ 오마이뉴스


세월호 청문회를 보면서 '5공비리 청문회'를 떠올리는 것은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필요조건을 환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반드시 선행되어 합니다. 여소야대 국면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그 첫째요, 진실을 밝혀내고 성역없이 책임을 묻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그 두번째입니다. 이 두가지가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혀내는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국정원 사건과 사자방 비리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5공비리 청문회'를 통해 맛보았던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다시 느끼려면 이 땅에 선거혁명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거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자행된 수많은 비리 의혹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정치권과 이 사회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고 있는 세월호 청문회는 하늘의 별이 된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무언의 메시지인지도 모릅니다. 진실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에 대하여, 그리고 이 사회와 어른들의 책임에 대하여. 차디 찬 바다 속에 머물고 있는 세월호는 여전히 우리에게 물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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