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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동원된 아이들, 그들은 왜 떨어야만 했을까?

지인에게서 사진 한 장을 건네 받았다. 링크를 따라 들어가 보니 한겨레 신문사 이승준 기자의 짧막한 글이 사진과 함께 게시되어 있었다. 사진은 수십명의 어린 학생들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한 구리시청 소년합창단원들이다.


아래는 이승준 기자가 남긴 글의 전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26. 초등학생들인 구리시청 소년합창단원들은 홑겹 단복만 걸친 채 영결식이 열리는 두시간 동안 떨어야했습니다. 추위에 떨다 마침내 차례가 돌아온 단원들은 울듯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른들은 두툼한 외투에 목도리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융통성 없이 저렇게 일하는 관료들이 안타깝습니다. 여전히, 힘없고 약한 아이들을 챙기지 못하는 어른들이 안타깝습니다.'



한 장의 사진은 참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있다. 굳이 정치적인 시선을 가지고 보지 않아도 이 장면이 국가가, 사회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야 할 올바른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자기 몸 추운 줄은 알면서 아이들의 추위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어른들. 이들은 아직 채 피지도 못한 꽃다운 아이들을 깊은 바다 속에 밀어 넣은 그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다.



ⓒ 한겨례 트위터



영결식에 참석한 합창단원들은 동원된 아이들이다. 권위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나라일수록 동원의 미학은 극대화된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시절이야말로 동원의 미학이 최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정부 행사가 있는 곳마다 사람들이 동원됐고 더러는 영문도 모른 채 행사장에 이끌려 나가야 했다.

권위주의에 빠진 권력은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세를 과시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기를 원한다. 자신들이 동원한 일단의 무리들로 자신들의 위상과 권위를 한껏 뽐내는 이 우스꽝스런 장면이야말로 권위주의적 권력의 허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촌극이다.

물론 영결식에 참석한 아이들이 박근혜 정부의 권위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국가행사에 동원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문제는 동원된 아이들이 국가행사가 벌어지는 동안 정신적·육체적 고통 속에 방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영결식이 치뤄지던 26일은 눈발이 흩날리던 영하의 날씨였다. 바람도 제법 불었기 때문에 탁 트인 영결식장의 체감온도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 아이들이 겪었을 추위와 고통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이는 단지 영혼없이 움직이는 관료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로 무장한 채 영결식에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가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중앙일보



이 날의 장면은 어느해 봄 벌어졌던 그 사건과 여러가지로 닮아 있다. 제 한 몸 살겠다고 배에서 먼저 탈출한 승무원들이나, 제 한 몸 따뜻하겠다고 외투와 목도리를 두른 어른들이나 매한가지다. 배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이들이나, 추워도 외투를 입지 말라는 어른들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살려달라는 절규를 외면한 이들이나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나 몰라라 한 사람들이나 똑같다. 우리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대통령부터 일반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같은 말을 했다. 녹음기처럼 다짐했고 또 되뇌였다. 잊지 않겠다고, 기억하겠다고, 그 날과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대한민국은 달라질 거라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거라고. 마치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모두가 하나되어 같은 말을 토해냈다. 그러나 슬프게도 달라진 것은 없다. 우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더욱 슬픈 건 달라져야 한다는 말조차 이제는 꺼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이럴 것이었다면 그 때 조금만 말해 둘 것을. 조금만 아껴둘 것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결과보다 나는 사람들의 지독한 무심함이 더 섬뜩하고 무섭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라면 내일 당장 그날의 사고가 다시 일어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다시 슬퍼하고 또 다시 절망하고, 또 다시 같은 말을 하고 다짐을 하겠지. 달라져야 한다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 노컷뉴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동원됐던 소년합창단원들은 행사 내내 극심한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누가 이 아이들을 추위에 떨도록 만든 것일까. 바로 눈 앞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의 몸 하나도 녹여주지 못하는 국가가, 사회가, 그리고 어른들이 과연 이 아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낼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른들이 내 놓을 차례다. 아이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이 부끄러운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한 어른들이, 여전히 힘없고 연약한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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