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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 과연 법원에 있는가

ⓒ 오마이뉴스


석방, 석방, 기각.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및 선거개입 혐의, 이른바 '댓글 공작' 혐의에 대해 법원이 내린 판결이다. 구속됐던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은 구속적부심을 통해 석방됐고, 이명박 정권의 '안보실세'로 알려진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에 대한 구속영장 역시 기각됐다.


줄줄이 풀어주거나, 불구속 수사다. 적폐청산과 관련된 중요 피의자의 구속영장이 잇따라 기각되고 석방되다 보니,  법원이 때마다 내놓는 사유인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 '주거 일정', '다툼의 여지', '구속할 사유와 필요성' 등이 이제는 입에 착착 붙는 지경이 됐다.

김 전 기획관의 영장을 기각한 서울지방법원 강부영 영장전담판사가 밝힌 기각 사유 역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강 판사는 "객관적 증거자료가 대체로 수집된 점, 주요 혐의사실에 대한 피의자의 역할 및 관여 정도에 대해 다툴 여지가 있는 점, 관련된 공범들의 수사 및 재판 진행 상황, 피의자의 주거 및 가족관계 등을 종합하면 피의자를 구속할 사유와 필요성 및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임 전 실장이 석방된 데 이어 김 전 기획관의 영장까지 기각되자 일각에서는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수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댓글 공작을 용인한 총책임자가 풀려났는데 직속 수하인 임 전 실장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을 이어주는 통로에 불과한 김 전 기획관을 구속할 수는 없었을 것이란 분석이다. 영장실질심사를 담당했던 이정렬 전 판사 역시 이 점을 꼬집었다.

이 전 판사는 13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인터뷰에서 "김관진 전 장관 석방 결정이 지금 상황에서는 거의 바이블이 돼 버린 것 같다"고 한탄했다. 이어 "검찰의 영장청구서를 보면 군의 정치 관여 총책임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고 군 실행 부문의 총책임자는 김관진 전 장관"이라며 "실행 총책임자가 구속적부심에서 나왔는데 연결고리 정도밖에는 안 되는 사람을 구속하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요컨대 자가당착을 피하기 위한 법원의 판단이라는 거다.

그러나 법원의 법리적 형평성은 이미 군 사이버사 댓글 공작의 실무책임자였던 이태하 전 심리전 단장 구속으로 깨진 상황이다. 이 전 단장은 2012년 대선 당시 특정후보와 정당을 비방·지지하는 댓글 공작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돼 1심과 2심 모두 실형을 선고 받았다. 주목할 것은 지난 2월 7일 열린 항소심에서 나온 법원의 양형 사유다. 당시 법원은 이 전 단장이 댓글 공작을 통해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부여한 자유경쟁의 기회를 침해했으며, 헌법이 달성하고자 하는 가치 중 하나인 '군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정면으로 위반했다"며 "이 전 단장이 직접 또는 530단 부대원들에 대한 지시를 통해 헌법적 가치를 무시하고, 이러한 가치가 지켜지길 바라는 국민의 군에 대한 기대와 믿음도 저버렸다"고 강조했다.


이 전 단장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단호하고 엄중했다. 그가 헌법이 명시한 군의 중립의무를 위반하고, 적극적인 정치개입 행위를 통해 헌법가치를 심각하게 유린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법원이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립하고 재발을 막기 위해서 엄벌이 불가피하다"며 1심에 이어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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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 전 장관과 임 전 실장의 구속적부심을 담당했던 신광렬 수석부장판사나 김 전 기획관의 영장실질심사를 맡았던 강 판사의 법리적 판단은 달랐다. 군이 정치에 관여하고 선거에 개입한 정황증거들이 명확하게 드러났음에도 이를 주도한 핵심 피의자들을 구속 수사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법원의 판결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펼쳐지고 있는 배경이다.

실제 검찰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온라인과 소셜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법원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 국민의 법상식과 어긋나는 판결이 잇따르면서 법원의 법리적 판단에 본질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추상 같이 법리를 따져 묻는 법원이 국정농단이나 국가기관의 정치개입 같은 중대범죄에 대해서는 외려 지나치게 관대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는 적폐청산 작업이 법원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히면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법원에 대한 '피로감'의 표출일 테다. 대의민주주의와 헌법질서를 뿌리채 뒤흔든 사안의 중대성과 죄질의 정도 등을 감안하면 법원의 판단이 시대흐름을 쫓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일 것이다.

왜 아니 그럴까. 무도한 권력이 나락으로 떨어트린 국가기강과 사회공동체의 질서를 국민들이 나서서 바로잡지 않았는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헌법을 농단한 세력들을 국민들이 끌어내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오·남용한 국정농단 세력과 적폐 세력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함이 마땅할 터. 그런데, 시대적 당위인 적폐청산이 법리에 번번히 가로막히는 모양새이니 구체제를 종식시키기를 갈망하는 주권자들의 비판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나.

물론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거나 구속적부심을 통해 석방하는 법률 행위가 법원의 고유한 권한임에는 틀림이 없다. 구속적부심 인용이나 영장기각이 범죄 피의자에 대한 유무죄를 가리는 법률적 판단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자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법은 보편적 상식의 기반 위에 서있어야 한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유권무죄(有權無罪), 무권유죄(無權有罪)'가 공공연히 회자되는 시절이 아닌가.


2015년 기준, OECD 회원국 42개국 중 우리나라(27%)보다 사법신뢰도가 낮은 나라는 콜롬비아(26%), 칠레(19%), 우크라이나(12%) 등 3개국에 불과하다. 한국행정연구원이 2016년 실시한 '사회통합 실태조사'에서도 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4점 만점에 2.1%로 하위권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법원을 향한 비판에 '독립성 침해' 운운하는 건 지극히 민망한 일이다. 사법 불신을 누가 초래하고 있는지 법원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 과연 법원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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