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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안철수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호남의 '역린'을 건드렸다

ⓒ 오마이뉴스


국민의당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갑작스럽게(?) 불거진 바른정당과의 통합 논의로 당내 이견이 속출하면서다. 통합에 적극적이었던 안철수 대표를 향해 당안팎의 비판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호남 중진 의원들의 탈당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어 통합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의 갈등의 골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급기야 당 일각에서는 당내 공론화 작업 없이 바른정당과의 통합 논의를 추진했던 안철수 대표에 대한 책임론마저 제기되고 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안철수 대표는 서둘러 진화에 나서는 모습이다. 21일 페이스북에 호남지역 의원들의 집단 반발을 야기시킨 실질적 원인이었던 이른바 '호남 배제설'에 대해 적극 해명하는가 하면, 지난 주말로 예정돼 있던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과의 만남 역시 무기한 연기했다.  또한 24일에는 호남 중진의원들과의 만찬 회동을 갖기로 하는 등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는 모양새다. 당내 의견 수렴을 통해 반발을 최소화시키겠다는 취지다.

정치권에서는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안철수계와 호남지역 의원들 사이에 내재돼 왔던 갈등이 통합 파문을 계기로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중도보수 성향의 안철수계와 중도진보를 지향하는 더불어민주당 탈당파 호남 의원들의 정치적 지향점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는 이념적 성향의 특성상 두 세력 간의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이 상존해 있다는 의미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국민의당 창당 당시 한상진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은 4.19 민주묘지를 참배했다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로 생각한다고 말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우익 세력인 뉴라이트의 수구적 역사관과 맥을 같이 하는 한상진 위원장의 발언에 야권지지자들의 비난이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창당 준비 과정에서 터진 정체성 논란에 국민의당은 당 차원에서 황급히 선긋기에 나서는 등 큰 홍역을 앓아야 했다.

흥미로운 것은 한상진 위원장이 안철수 대표의 멘토로 알려진 인물이라는 점이다. 안철수 대표와 국민의당에 대한 정체성 논란이 당시 거세게 일었던 이유였다. 그런가 하면 안철수 대표 역시 과거 한상진 위원장과 비슷한 역사인식으로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지난 2013년 8.15 광복절을 '건국 65주년'으로 표현해 야권 지지자들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으며, 교학사 교과서 파동 당시에는 이 문제를 진보와 보수 간의 이념 논쟁으로 규정해 역사 인식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역사 문제에 대한 안철수 대표의 이같은 인식은 끊임 없는 정체성 시비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안철수 대표는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모호하고 불분명한 입장을 취하며 호남 의원들과 상이한 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 대선 당시 TV 토론에서 햇볕정책에 공과가 있다고 말해 발언의 진의를 두고 당안팎의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고, 대선 이후에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제제와 압박을 강조하는 대북 공세 기조를 적극 주장하고 있다. 이는 DJ의 햇볕정책을 대북정책의 근간으로 삼고있는 호남 의원들의 인식과 상충한다. 


ⓒ 오마이뉴스


이처럼  안철수 대표와 호남 의원들 사이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호남 의원들에게 '햇볕정책'과 '호남지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호남 의원들의 맏형 격인 박지원 전 대표의 표현을 빌자면,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통합 논의의 과정에서 제기된 '햇볕정책' 폐기와 '호남지역' 탈피는 호남 의원들에게 자신들의 소중한 가치를 버리라는 강요나 마찬가지다. 호남 의원들의 저항과 반발이 거세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민의당 창당은 대권 도전을 위해 세력과 조직이 필요했던 안철수 대표와 총선을 앞두고 전국적 인지도를 갖춘 거물급 정치인이 절실했던 호남 의원들 간의 공감대가 맞아떨어진 정치공학적 결합의 성격이 강했다. 정체성과 노선, 정치적 지향점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세력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바로 그 점 때문에 총선 이후 국민의당이 정치적 갈등과 혼란에 휩싸일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기도 했다. 총선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노선과 이념 갈등이 부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민의당이 총선에서 크게 선전하면서 두 세력 간의 내부적인 이념 갈등은 자연스럽게 수면 아래로 가리앉아 버리고 만다. 총선 이후 당의 위상과 입지가 몰라보게 달라진 상황에서 그들이 노선 갈등에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캐스팅 보트'의 이점을 활용해 중도개혁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면 양당 체제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확신과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국민의당은 그 길을 가지도, 보여주지도 못했다.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합리적 중도 노선을 통해 정치 개혁을 이끌어내겠다는 계획도 아직까지는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대신 양당체제의 한계와 폐단을 공략하는 양비론과 기성정치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고수하고 있다는 평가다. 그런 면에서 지난 대선은 안철수 대표와 국민의당의 직면한 냉혹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터다.

대선 참패 이후 국민의당은 시쳇말로 죽을 쑤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제보조작 사건이 터진 이후로는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인 난감한 처지에 있다. 문제는 안철수 대표가 재등판했음에도 사정이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지율은 여전히 한자리를 맴돌고 있고, 반등을 위한 모멘텀 마련도 쉽지 않은 형국이다. 반면 잠잠하던 내부 갈등은 다시 꿈틀대고 있다. 안철수 대표의 '우클릭' 행보에 대한 당안팎의 비판이 제기되면서부터다.

안철수 대표의 노골적인 보수 행보는 대선 이후 국민의당 대선평가위원회가 발간한 대선평가보고서에서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안철수 대표가 확실한 전략과 철학 없이 중도보수 노선을 고집한 결과, 적폐청산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시대흐름을 끌어안지 못했다고 신랄하게 꼬집은 것이다. 대선평가위의 비판은 안철수 대표의 취임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안철수 대표가 강한 야당론을 앞세워 문재인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면서 당의 보수화를 앞장 서서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 대표가 주도한 설익은 통합 논의는 고조되고 있던 당내 노선 갈등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바른정당과의 통합 논의로 당내 파열음이 커지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안철수 대표의 행보도 그만큼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안철수 대표의 노력이 갈등 봉합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 논의 과정에서 드러난 안철수 대표와 호남 의원들 사이의 충돌은 의견 대립이나 소통 부족이 초래한 단순한 불협화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적 노선과 철학의 본질적인 차이가 잉태한 예고된 갈등이자 대립이다. 이 과정에서 안철수 대표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호남의 '역린'까지 건드렸다. 이번 파문이 쉽게 사그라들기 어려워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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