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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 답변서에 절망하는 이유

ⓒ 오마이뉴스


박근혜 대통령 측이 10일 논란이 되고 있는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에 대한 답변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헌재의 요구가 있은지 19일 만에 제출된 답변서의 요지는 이렇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고, 최선을 다해 사고에 대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 측이 제출한 장문의 답변서를 받아본 헌재의 반응은 아주 냉담했다.


헌재의 이진성 재판관은 "답변서 상당 부분은 대통령이 그동안 주장해왔듯 당일 보고와 지시에 대한 것을 기재한 것"이라며 "재판부가 밝히라고 한 것은 대통령이 기억을 살려서 당일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라는 것"임을 강조했다. 대통령 측이 제출한 답변서가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재판관은 이어 "대통령이 세월호 침몰을 최초로 인지한 시점이 언제인지가 중요한데 답변서에는 이 내용이 안 나온다. 기억을 살려서 밝히라"고 주문했다. 답변서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판단에서다. 


지난달 22일 열린 1차 변론 준비 절차에서 헌재는 세월호 7시간 의혹에 대해 시각별로 공적·사적 업무를 소상히 밝혀줄 것을 박 대통령 측에 요구했다. 그 이후 박 대통령 측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답변서 제출을 19일 동안 미뤄왔다. 이유야 어찌됐든 박 대통령 측에게 세월호 당시의 구체적인 행적을 시각별로 정리하고 소명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공개된 답변서는 그동안 청와대와 정부가 주장해온 내용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헌재가 박 대통령 측에 답변서를 다시 제출하라고 '퇴짜'를 놓은 이유다.


국회는 헌법 제10조에 의해서 보장되는 생명권 보호 의무 규정 위반을 탄핵사유에 포함시켰다. 이는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이 탄핵 심판의 중요한 쟁점 중 하나라는 의미다. 헌재가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행적을 소상히 밝히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동안 박 대통령 측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세간의 의혹을 전면 부정하면서도 사태 수습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했다고 주장해왔다. 이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박 대통령의 당일 행적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증거자료가 반드시 구비돼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박 대통령은 이를 해명하기만 했을 뿐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는 박 대통령 측이 장황하게 설명한 답변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답변서에는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모두 7차례에 걸쳐 전화통화를 했다고 적시했지만 이를 실제로 입증할 통화기록은 제시되지 않았다. 오전과 오후 안봉근·정호성 당시 비서관의 대면보고를 받았다고 돼있지만 이 역시 시간과 내용은 빠져 있었다. 중앙안전재난대책본부 방문을 지시한 이후 방문까지 2시간이나 걸린 이유에 대해서도 경호상의 이유로 함구했다. 이 모습은 불리한 내용은 감춘 채 근거 없는 변명만 늘어놓던 그동안의 행태와 하등 다를 바 없다. 



ⓒ 오마이뉴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1000일이 지나는 동안 박 대통령이 세월호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을 해소할 시간과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석연찮은 변명과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을 내놓기 급급했을 뿐 정작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자료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의혹은 의심으로, 의심은 실체로 점점 굳어져갔다. 급기야 박 대통령 측은 헌재에 제출한 답변서에서조차 세월호 참사 당일의 행적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의 행적을 밝힐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국가가 가장 기본적인 임무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노하며,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됐다. 정부는 자국민이 실종된 지 20여일이 지나도록 상황 파악조차 못했고 외교부는 AP통신의 실종 문의마저 묵살했다"

지난 2004년 7월2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그해 6월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피살된 김선일씨 사건을 언급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강력하게 비난한 바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 못했다며 분통을 터트린 당사자는 그러나 자국 국민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는 무려 1000일이 넘도록 실체 규명에 손을 놓고 있다. 이 극명한 대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편적 상식은 도덕과 윤리, 지식, 사회규범 등 사회공동체가 유지되는 밑바탕이 되는 가치관을 말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의 행적은 의문 투성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박 대통령 측이 내놓은 해명 곳곳에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는데다 이를 입증할 구체적 증거 역시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어쩌면 국민의 보편적 상식을 뒤엎는 박 대통령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인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 측은 세월호 참사 당시 짧게는 3분, 평균 20분 간격으로 쉼 없이 상황을 점검하고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수백명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7시간 가까이 관저에만 머물렀다는 사실부터가 납득이 안 된다. 어디 이것뿐인가. 박 대통령은 300명에 달하는 승객이 배 안에 갖혀있고 구조가 어렵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에도 머리 손질에 20여분을 허비했다. 1분1초를 다투는 중차대한 순간에 최고통수권자가 머리 손질에 천금같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가 박 대통령의 생명권 보호 의무 규정 위반을 탄핵사유에 포함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번 양보해 박 대통령 측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박 대통령의 직무유기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책임을 통감하기는 커녕 뻔뻔스럽게 자기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수많은 어린 생명들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최고통수권자의 수준이 고작 이모양 이꼴이다. 국민들이 한없는 분노와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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