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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새누리당의 인적청산이 코미디인 이유

ⓒ 오마이뉴스


연말 연초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물건 정리다. 방안 구석구석 쌓여있는 물건들 중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들을 선별해 내는 것이다. 구슬땀을 흘려가며 물건을 한참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방안 한켠이 각양각색의 물건들로 가득해진다. 낡고 해진 옷, 안 읽는 책, 오래된 액자, 그리고 각종 소품들. 한때 쓸모 있던 물건들이 어느새 천덕꾸러기가 돼버렸다. 이제 곧 버려질 운명에 처한 물건들의 신세라니. 참으로 얄궃다. 


그러나 이같은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 어디 낡고 오래된 물건들 뿐일까. 낡은 관성과 구태에 사로잡혀 변화와 혁신을 번번히 거부했던 새누리당 역시 버려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기는 매한가지다. 비박계의 대규모 탈당으로 풍비박산이 난 새누리당이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이 꺼내든 인적청산의 칼바람에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치고 있다. 


새밑이었던 지난달 30일 인 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 출범 이후 호가호위 하고, 무분별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지나친 언사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못난 행태를 보인 사람은 인적청산의 대상"이라며 친박계 핵심인사들을 겨냥했다. 그는 "패권적 행태를 보이며 국민의 지탄을 받고 실망을 준 사람들은 오늘의 이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며 1월6일까지 친박계 핵심인사들의 탈당을 요구했다.


인 위원장이 인적청산의 대상으로 꼽은 인사들은 분당 전 비박계가 자진 탈당을 요구했던 '친박 8적'(이정현 전 대표(탈당), 조원진·이장우 전 최고의원, 서청원·최경환·홍문종·윤상현·김진태 의원)을 포함해 15명 내외다. 인 위원장은 "인적청산 없이 비대위를 구성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며 인적청산이 새누리당 재건의 전제조건임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이 문제에 자신의 거취를 연계하는 배수진을 치기까지 했다 .

그러나 인 위원장이 꺼내든 칼에 호락호락 앉아서 당하고 있을 친박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너나 없이 인 위원장의 인적청산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특히 친박계의 쌍두마차라 할 수 있는 서청원·경환 의원은 인 위원장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서청원 의원은 새해 벽두부터 당 소속 의원들에게 인 위원장의 인적청산을 비판하는 입장문을 보냈고, 최경환 의원 역시 대구시·경북도당 신년교례회에서 "마지막 1인이 남을 때까지 새누리당을 지킬 것"이라며 결사항전의 뜻을 내비쳤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피로감과 한심함이다. 지난 수년 혹은 수십년간 새누리당에서는 똑같은 문제가 반복 재연되고 있는 탓이다. 각종 부정·비리와 낯뜨거운 추문이 터져나오고 이를 수습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 이어지고 있지만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에 독단과 독선, 불통, 폐쇄적·수직적 시스템, 지역주와 패권주의, 부도덕과 불공정 등이 새누리당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버린지 오래다. 


원인은 먼 데 있지 않았다. 이는 눈 앞에 닥친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는 인식이 당내 전반에 만연해있기 때문이었다. 새누리당은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라는 꽃놀이패를 가진 정당이다. 이미 철옹성과 같은 지역주의의 갑옷을 두른 새누리당이 시대적 당위이자 요구인 정치개혁과 정치혁신에 나설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보수정당을 표방하는 새누리당에게서 '보수의 가치'를 찾아보기 힘든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 오마이뉴스


그런데 새누리당의 존재 기반이었던 지역주의와 패권주의가 외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기막힌 반전이 일어났다. 보수정권 9년의 일방적 국정운영으로 민주주의와 시민권 후퇴에 대한 불만과 반발이 커져가고 있던 가운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절망한 지역민심이 완전히 돌아서자 새누리당을 지탱해 줄 구심점이 일거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기에 지난 총선에서 백일하에 드러난 친박 패권주의 역시 개선될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새누리당에 대한 기대가 점점 엷어지고 있는 것이다. .


행동이 결여된 반성은 어디까지나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연말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민심은 '박근혜 탄핵'과 '새누리당 해체'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국민은 우리 사회의 비정상화를 주도했던 박 대통령과 이를 방조·방기해온 새누리당의 책임을 엄중하게 추궁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이번에도 국민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의 본질을 꽤뚫어 보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은 당의 '해체'가 아닌 '리폼'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새누리당을 '리폼'해 재사용하자는 인식에는 인 위원장이나 친박계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면서 이 둘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인 위원장은 친박계 핵심인사들의 출당을 통해 당 쇄신을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졸지에 쫓겨나게 될 처지가 된 친박계 핵심인사들은 2선 후퇴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당은 떠날 수 없다며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혈투가 새누리당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본디 '리폼'은 낡고 오래된 물건을 새롭게 고쳐 쓰는 것을 말한다. 한심한 것은 인 위원장이나 친박계 모두 인적 쇄신과 정책 변화 등을 통해 새누리당이 재도약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안이한 인식은 새누리당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새누리당의 몰락은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독단과 독선의 패권주의가 당내에 만연해 있던 탓이었다. 새누리당의 당내 민주화가 괴사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 안팎의 제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견제해야 할 개혁세력이 패권싸움에 휘둘려 설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새누리당의 쇄신과 내부개혁의 동력을 사라지게 만든 주축세력이 바로 친박계라는 사실이다. 새누리당을 몰락시킨 주역들이 모여 당 쇄신과 보수혁신을 외치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코미디란 얘기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핵심친박들이 당을 떠난다 해도 달라질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설령 인 위원장의 바람대로 친박핵심 인사들이 탈당을 한다 해도 새누리당이 여전히 '친박당'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국민들이 새누리당의 '해체'를 부르짖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쳐 쓰기엔 새누리당이 너무나도 '낡고 닳았다'는 사실을 영민한 국민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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