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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정현 건강은 걱정하면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외면하는 대통령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단식이 연일 화제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류언론에 의해 자세하게 생중계되고 있고, 같은 당 소속 의원들은 그의 단식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경쟁하듯 쏟아내고 있다. 덕분에 국민들은 이 대표의 단식 소식을 하루도 빠짐없이 깨알같이 접하고 있다.


그의 단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명하게 갈린다. 집권여당의 대표가 오죽하면 단식에 임하겠냐며 안타까움을 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고 대놓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이 대표의 단식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개별주체의 가치판단의 몫일 터. 어쨌든 그는 지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숨 바칠 각오로 단식에 임하는 중이다.

며칠 째 단식이 이어지면서 그의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의료진이 그의 건강상태를 수시로 체크하고 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정치권 여기저기에서 이제 그만 단식을 멈추라는 간곡한 당부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 대표의 건강을 염려하기는 박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김재원 청와대 정무수석이 9 30일 이 대표를 위로하기 위해 국회를 찾았다 한다. 그가 이 자리에서 "대통령께서 많이 걱정을 하셔서 단식을 중단해달라 요청하러 왔다"며 이 대표의 단식 중단을 요청한 모양이다.



ⓒ 오마이뉴스


유감스럽다. 대통령의 피아구분법이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집권여당 대표의 건강을 염려해 정무수석을 득달같이 국회로 내려보낸 대통령이 국가폭력에 희생된 국민의 죽음에는 나 몰라라 침묵하고 있다. 5일째 단식 중인 이 대표의 건강을 걱정하는 대통령이 46일 동안 단식했던 김영오씨에 대해선 일언반구의 입장 표명도 하질 않았다. 이 둘은 과연 동일인인가. 대통령의 이율배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 대선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는 지역과 이념, 계층을 초월해 하나 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자신이 그 적임자라고 강변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양성의 시대, 사람마다 생각과 가치가 모두 다를진대 이를 어떻게 통합시키겠다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합이란 둘 이상의 조직이나 기구 따위가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 또는 여러 요소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경우를 일컫는다. 전체주의 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에 통합을 거론하는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마치 통합이 시대의 화두인양 거침없이 말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다. 개개인의 사상과 이념, 철학과 가치관이 다양하게 표출된다. 애시당초 대통령이 꺼내든 '통합'이 시대 정신과는 동떨어진 시대착오적 발상이었다는 의미다. 혹자는 대통령의 '통합'이 사전적 정의나 통념과는 다른 개념이었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은 지금과는 정반대로 흘러갔어야만 했다.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가치와 이념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의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려 노력했어야 했다는 뜻이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지향하는 목표가 다를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서로 간의 차이를 좁혀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의미의 '통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 터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과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탓이라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극강의 획일주의와 권위주의가 득세하던 시대, 정치권력의 중심에서 아버지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보고 자랐을 그가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가 말하는 '통합'이 아버지 시대에 횡횡했던 전체주의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오마이뉴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21세기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전체주의의 유물인 '통합'을 거론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통합'이 아니라 '화합' '연합'을 말해야 하는 시대이며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한 가치와 사상을 존중하며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는 중재자로서의 책무가 바로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역할을 기대하기가 요원하다. 그는 갈등의 조정자, 중재자가 아니라 어느새 갈등과 분열의 유발자가 되어 있다. 아주 멀리는 국정원 사건에서부터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그리고 가장 최근의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 분열의 중심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 사이, 사람들이 자꾸 죽어간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대통령의 탓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통령은 책임을 지는 자리다. 모든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겠으나 그 죽음이 촉발한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치유할 책임은 온전히 대통령에게 있었다. 사람들이 죽어갈 때, 사람들이 아파할 때 이 나라의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 나라에는 각기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한다. 집권여당 대표의 건강을 살뜰히 챙기는 대통령과 국가 공권력에 희생당한 농민의 죽음을 외면하는 대통령. 한 편의 부조리극이 따로 없다. 그에게는 '내가, 우리가 바로 백남기다'라고 외치는 수많는 국민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유감'이 밀려간 자리,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역류한다. 전태일이, 이한열이, 강경대가 떠났을 때 느꼈던 그 분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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