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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월호와 메르스 닮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

지난 2014 10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장안의 화제를 불러 모았던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40대 이상의 '올드보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장면이 등장한다. 공원에서 심하게 말다툼을 벌이던 '덕수' '영자'가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돌연 다툼을 멈추고 기계적으로 가슴에 손을 얹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은 국가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그랬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곧 나라 사랑을 의미했고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의례와도 같았다. 국민이라면 당연히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애국가 4절을 막힘없이 불러야 했다. 이는 애국과 충성을 국민이 갖추어야 할 최상의 덕목이자 가치라고 여겼던 시절의 흔하디 흔한 일상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은 그 당시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지금은 시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시대다. 과거 독재시대나 권위주의 시대에 활개쳤던 국가주의의 흔적들도 그에 발맞춰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국가는 국기에 대한 경례도, 국민교육헌장도, 애국가 4절도 시민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시의 통념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20세기의 사고와 인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자 대통령은 애국심의 중요성을 여러차례에 걸쳐 환기시켰다. 그러자 정부 부처들을 중심으로 '국기하강식'을 부활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태극기 달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일반 건물에는 국기 게양대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공무원 면접 시험에서 애국가 4절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워보라는 질문이 등장하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국경일에 태극기와 함께 찍은 인증샷을 곁들인 소감문을 발표하라는 지침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올바른 역사교육이 필요하다며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이율배반이 연출되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하면 국민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이 고취된다고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다. 



ⓒ 오마이뉴스


지난 1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는 그 어느때보다 뜨겁고 치열했다. 이날은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에 대한 환경부의 현안보고가 있는 날이었다. 여야 의원들의 질의에는 서슬 퍼런 날이 서 있었고, 현안보고 차 회의에 참석했던 윤성규 환경부 장관은 답변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윤 장관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해 "장삿속만 챙기는 상혼과 안전관리 법제 미비가 중첩돼 빚어진 대규모 인명살상행위"라며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윤 장관은 피해자에게 사과하라는 의원들의 요구는 한사코 거부해 빈축을 샀다. 그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일그러진 상혼과 제도의 미비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최초 부각된 것은 지난 2007년 무렵이였다. 그러나 피해자가 계속 발생하는 상황임에도 정부는 진상규명과 대책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정부 차원의 역학조사는 2011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정부가 미지근한 대응으로 일관하는 사이 피해자가 속출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역사조사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 법률안은 환경부와 기획재정부의 반대와 여당인 새누리당의 제동 속에 수년 째 막혀있는 상황이고, 검찰의 수사 역시 최근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정부의 안일한 대처와 여당의 미온적인 태도, 검찰의 늑장 수사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이 안타깝게도 146(정부 발표)의 소중한 목숨이 희생되고 말았다.

정부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는 윤 장관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가습기 피해자를 자신이 왜 만나야 하느냐고 반문하는가 하면, 이 사건이 기업과 개인 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과거 기획재정부가 환경부에 보낸 자료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틀리지 않다는 인식을 보이기도 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윤 장관의 인식과 태도 속에서 '책임'이라는 단어는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다. 



ⓒ 오마이뉴스



지난 2015 OECD가 발표한 '한눈에 보는 정부 2015'(Goverment at a Glace 2015)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중 34%만이 정부를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015 9 17 JTBC뉴스의 <탐사플러스>가 한 포털사이트와 함께 설문조사한 결과 '한국이 싫어서 다른 나라로의 이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라는 질문에는 21천명의 응답자 중 88%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유로는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대형 사건사고나 정치적 문제로 인한 '정부 불신'이 가장 컸다.

국민 10명 중 7명이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고, <탐사플러스>의 설문에 응한 사람들 중 무려 88%가 이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국민들이 국가와 정부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위정자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국가에 대한 국민의 애국심은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다양한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종 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가습기 살균제 파문 등에서 나타난 정부와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이 주된 요인이라는 것이 일반론이다. 정부와 국가가 자국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도, 그렇다고 책임지지도 않으니 애국심이 생길래야 생길 턱이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에 비견한다정부의 대응 방식이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당시와 똑같기 때문이다이 사건들은 모두 정부의 늦장 대처와 안일한 대응으로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사고 이후에도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재발방지대책이 수립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똑같다

2년 전에 발생했던 세월호 참사는 아직까지 무엇 하나 속시원히 해결된 것이 없고, 1년 전 일어났던 메르스 사태의 후유증 역시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다. 최근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무려 10년 전부터 그 폐해의 심각성이 제기되어 온 사안이었다. 이 일련의 흐름들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국가와 정부의 모습이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사랑하고 싶어도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든 '기묘한' 나라 대한민국. '헬조선' '지옥불반도'라는 극단적인 혐오와 경멸의 표현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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