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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 대통령의 간담회 발언, 모아놓고 봤더니

국문학을 전공한 탓에 비문이나 잘못 쓰는 말에 민감하다. 셰프가 맛에 민감하다거나 음악가가 소리에 예민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까닭으로 글을 읽을 때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상대가 비문을 쓰지는 않았는지, 잘못된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살피게 된다. 수십년 째 고쳐지지 않고 있는 오래된 습성 중의 하나다.

박 대통령이 26일 청와대에서 45개 언론사 편집·보도국장과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그동안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던 박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언론인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날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고 활기가 넘쳤다. 언론은 이날 간담회에서 박 대통령이 했던 말들을 깨알같이 옮겼다.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장관들과도 서면이나 유선을 통해 보고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온갖 ''들이 즐비하다. 대인기피증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도 하고, 명령과 지시에 익숙한 습성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상대를 설득할 만한 논리와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들도 나온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알겠다. 그가 서면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 뉴시스


박 대통령은 이날 각종 시국현안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길게 늘어 놓았다. 그런데 그 대부분에서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발견해내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앞 뒤의 문장을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하지 않고 말하는 박 대통령 특유의 화법이 이날 유난히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나 사물을 대신하는 대명사를 쓸데없이 남발하고, 한 문맥 안에서 같은 단어를 의미없이 반복하며 논점을 이탈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현대사가 정의롭지 못하고 오히려 이 대한민국은 오히려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더 잘하고 있고 정통성은 북한에 있고, 이렇게 인식이 되면서 자라나면 우리 세대가 대한민국에 대해서 전혀 자부심이나 긍지도 느낄 수 없고 또 통일시대에도 이거 뭐 북한식으로 되어버리고 말 것"

박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당위를 언론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문어가 아닌 구어라는 점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의 발언은 문맥과 문맥이 이어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 만약 '국정교과서의 당위를 설명하시오'라는 구술시험에 이렇게 답을 했다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험관의 시선에 쥐구멍을 찾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법과 화법을 허무는 박 대통령의 맹활약은 이날의 간담회 동안 내내 이어졌다.

"여소야대다. 이렇게 국민이 만들어준 틀 속에서 하는 게 낫지, 더 어려운 것은 내부에서 계속 막 이리 간다고 그러면 저리 가야 된다고 그러고, 국민들 혼란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이런 게 큰 문제" - 총선 이후 여권 내의 불협화음을 걱정하며

"'나는 내 정치를 하겠다' 그래서 그 방향으로 가니까 그걸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라 마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거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되고 나서 그 길을 간다고 하면 그 것을 어떻게 하냐" - 유승민 의원을 비판하며

"어버이연합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것은 보도에, 또 인터넷에 올라와서 어버이연합이 어떻게 했다 어디 가서 어떤 것을 했다 그런 것으로다가 아는 정도"

"시민단체가 이것 하는데 이게 어떠냐 저쩌냐 하는 것을 대통령이 이렇다 저렇다 하고 평가하는 것도 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어버이연합 집회 문제에 대해

"세계가 참 부러워하기도 하는 그런 경제발전, 이런 데 대해서 이건 반노동적이고 어떻게 해 가지고 잘 못된 이런 걸로 자라나는 사람 머릿속에 심어지게 된다" - 국정교과서 문제를 언급하며

"20대 국회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가장 중요한 것은 좀 민생 살리고 일자리 좀 많이 만들고 그렇게 해서 다 좀 협력을 해서 그렇게 우리 삶이 좀 나아지게 해 달라, 그러니까는 그 이야기가 주로 된 캠페인이었다고 생각한다" - 20대 총선에 나타난 민심에 대해

"우리가 선제적으로 그런 어떤 전략적 선택을 했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이런 것에 힘을 모아가지고 할 수 있는 어떤 큰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

"말하자면 칠 시간이 있겠느냐 하는 것은 제가 너무 바쁘고 그러니까. 다 공직자들이 그렇지 않겠느냐는 곧이곧대로···. 하여튼 '한번 클럽에 나가게 되면 시간 걸리고 여러 가지 그날 하루가 다 소비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바쁘겠다 그것까지 하려면'이라고 순수한게 생각한 것" - 과거 자신의 발언이 골프금지령으로 해석된 것에 대해

"내가 휴식도 하면서 내수 살리는데 기여를 하겠다 이런 마음도 가지고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지나치지 않으면서 국민들이 받아들일 때 내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고 좋다 이렇게 느끼게 되지 않겠는가" - 공직자 골프와 내수 활성화를 연계해 설명하며



ⓒ 오마이뉴스



박 대통령이 이날 보여준 어법과 화법은 굳이 국문학 전공자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언급하기에 민망한 수준이다. 그가 일반인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는 탓이다. 몇 번을 곱씹어 봐야 겨우 진의가 파악이 되는 박 대통령의 화법. 각료라면 식은 땀이 날 것이고, 언론인이라면 한숨이 날 것이며, 국어학자라면 땅을 치고 싶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이날 간담회 발언들을 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박 대통령의 행적들에 대해서 말이다. 
박 대통령이 서면과 유선보고에 집착하는 이유를, 언론과의 인터뷰나 기자회견을 그토록 기피하는 이유를다른 사람에게 대독사과를 시킨 이유와 세월호 유가족을 다시 만나주지 않는 이유를, 그리고 국민과 소통할 수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까지도이제는 확실히 알겠.


박 대통령의 화법이 하루 아침에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로지 수작업에 의지해야 하는 '박근혜 번역기'의 도움이 없다면, 그가 양산해 낸 정체불명의 말들을 이해하기란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대통령의 발언을 해석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번역기'를 돌려야만 하는 국민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웃지 못할 촌극이자 요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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